
나 없어도 안 죽더라
지난주 목요일 조금 이상한 경험을 했다. 실로 오랜만에 그저 쉬고 싶다는 이유로 치과를 간다는 핑계로 연차를 썼다. 지난밤 역시 책도 읽고 스팀잇도 하고 글도 쓰고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제법 늦게 잤는데 커튼이 없는 방에서는 7시가 되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피곤하지 않았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 졌다. 평소 듣던 연주곡을 플레이하고 히비스커스 티백을 우려낸 와인색으로 물든 차를 마셨다. 여유롭게 파스타를 해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별다른 대기줄 없이 은행에 들려 볼 일을 처리하고 사람이 거의 가득 찬 스타벅스 책상석에 앉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었다. 올해 들어 이렇게 행복하고 충만했던 날이 있었던가?
연차를 써도 금요일에 대체휴무로 쉬게 돼도 그다지 기쁘지 않다. 몸만 회사를 가지 않았지 업무가 시도 때도 없이 내 일상에 끼어들어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그렇게 간헐적으로 자질구레하게 신경을 쓰다 보면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원래 핸드폰이 있든 말든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회사를 다니고 나서는 작은 진동 소리만 울려도 깜짝 놀라며 핸드폰 화면을 시도 떼도 없이 켰다. 나는 카톡 알람이 제일 싫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도 이미 카톡이 울리는 순간 내게 짜증과 불안함이 지나간 이후다.
사실 그날 아침에도 업무에 관련해서 기분 나쁜 신호를 받았다. 내 핸드폰 앱은 회사 메일과 연동이 되어있어 나는 실시간으로 메일과 카톡을 확인하는 일에 익숙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켜고 나의 기분이 그날 정해지곤 한다. 밤사이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잔뜩 있다는 ASAP, URGENT, IMPORTANT 긴급 메일이 도착해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다 그게 제일 좋은 날이다. 그리고 그날은 정말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일이 이미 일어나 있었다. 나는 알림 창을 그대로 꺼버렸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재수 없이 연락이 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도움을 명확히 요청하기 전까진 신경 쓰지 말자. 나 없어도 안 죽는다.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오늘 연차고 쉬는 날이다.'
나는 그날 카톡 단체방의 알람을 끄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회사 사람의 카톡 한 번을 끝으로(사실 그것도 굳이 그날 내게 알려줄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 그 인간은 원래 생각이 모자란 인간이니 그냥 '네'하고 내버려두었다) 그날 하루가 갔다. 물론 다음날 나는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폭탄 세례를 맞았다. 어차피 내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다 내가 처리해야 했고 하루 쉰 덕분에 소처럼 일했는데도 일이 끝나질 않았다. 휴식과 행복의 대가는 컸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목요일 카페에 앉아 문득 그 순간이 너무 감동스러워져 주변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인상을 찌푸리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스트레스에 말라갈 시간, 현실의 변화 같은 건 없는데도 나는 행복했다.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을 누리는 편이 훨씬 이로웠다. 선적이 밀리든 사고가 나서 난리가 나든 매출이 줄든 5년 후 내가 그 문제를 기억이나 할까. 내 인생에 그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코딱지만큼도 되지 않는데도 내 삶의 1/3을 그 문제와 싸우며 살고 있다. 그다지 내게 중요하지 않은 건 그 순간이 아니면 굳이 고통받을 이유가 없었다. 비록 내일은 그 문제로 고통받는다 한들 말이다.
내일의 고통이 예정되어 있어도 오늘의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선택하면 되는 문제다.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 마치 그 자리에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압박을 느끼거나 역할이 주어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 아니더라도 안 죽더라. 나 아니더라도 회사는 어떻게든 돌아가더라.
감정은 본능이지만 붙잡을 감정을 선택할 순 있을 것 같아.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속에는 어떤 대상과 감정이 자연적으로 조건화되어 쌓인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분명히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와 심하게 싸우고 다신 만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싸운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요해서 양보할 수 없는 사활을 걸었던 문제인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미웠는지는 감정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때로는 그 이유는 다 잊었어도 여전히 그 사람이 밉다. 기억은 불완전해도 감정은 제법 선명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하나 할 때마다 외부 대상들은 저마다의 감정을 하나씩 짝을 맺고 저절로 그 대상을 상상하기만 해도 그 감정이 내게로 온다. 카톡은 짜증, 커피 포트는 여유, 전화벨은 두려움, 쿠키는 충만함, ATM기는 유쾌함, 은행나무는 그리움으로 치환된다. 이유와 기억은 잊었어도 내겐 익숙한 감정의 방아쇠로 작용한다.
후지모토 사카코의 '돈의 신에게 사랑받는 3줄의 마법'이란 책이 있다. 엄청 유치한 제목과 다르게 내게 큰 인상을 남겨 이 감정 시리즈를 적으면서 한 번은 써야지 했었다. 그 책엔 게임 속 캐릭터가 된 듯 자신의 배경을 바꿔버려 인생을 바꿔버리는 방법이 적혀있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적겠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라 한다. 자신이 평소 하고 있는 생각을 적고 객관적인 사실을 떼어내는 것이다. 솔직히 일기를 적어내려가면 거기에 사실은 몇 줄 없고 단순하다. 그 외에는 모두 감정이다. 주관적이며 변화 가능한 감정이란 것이다.
저자는 이런 류의 말을 했다. (지금 책이 없어도 정확히 적을 수가 없다) 인생은 다양하고 충만한 감정을 느끼기는 데 의미가 있다고. 어차피 감정이란 건 내가 만들어내는 거짓인데 이왕이면 내가 느끼고 싶고 좋은 감정이 가득한 거짓된 세상에서 사는 게 개인의 행복에 좋지 않겠냐고.
그 대상과 연결된 감정을 갑자기 내 마음대로 바꿔버릴 순 없다. 그러나 떠올리고 하루를 채워갈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 감정을 좀 더 느낄 것이냐 지나가게 놔둘 것이냐는 나의 선택이다. 어차피 그날 하루 내가 꼭 느껴야 할 의무에 가까운 예정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평온하기 보다는 역시 마음껏 울고 마음껏 웃고 싶다.
감정의 낙폭이 큰 게 피곤한 일인 건 안다. 안정적인 사람을 동경했고 너무 들뜨지도 실망하지도 않은 채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의연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별 거 아닌 일에 과하게 들떴다가 기분이 우울해져 의기소침해지면 그 차이를 가늠하며 견디기 힘들 때도 생긴다. 그러나 역시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으며 세상 제일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가 슬퍼지면 목놓아 펑펑 울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라지 않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사랑해주고 싶고 미운 사람이 밉다면 신경 안 쓰고 마음껏 미워해버리고 싶다.
내 감정의 농도를 제한하고 싶지 않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다가올 불행이 두려워 억누르고 싶지 않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그만큼 크게 느껴야 한다고 해도 괜찮다. 나는 그만큼 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니깐 나쁜 감정도 좋은 감정도 모두 감당할 수 있다. 다 왔다 가는 감정이라면 좋은 감정은 붙들고 놔주지 않고 매일 소환해버릴 거고 나쁜 감정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가버리게 놔둘 것이다.
내 남자친구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감정적 동요가 적으며 평온하고 일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깔깔거리고 흥분해서 고조되었다가도 시무룩해져 엉엉거리는 광경을 목격하면 흥미진진한 오락 프로그램이라도 발견한 듯 주의 깊게 관찰했다. 시간이 지나며 남자친구의 차분함은 내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나의 이 급격한 감정의 진폭은 남자친구를 물들어버렸다. 처음보다 그는 더 많이 웃고 불만도 더 크게 말하고 나를 놀리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 즐겁다는 듯이 깔깔 웃는다.
그는 나 같은 감정적인 인간을 처음 만나보다고 했다. 그래서 어떠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 네가 힘들어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그보다 좋은 순간이 더 많아. 너랑 있으면 다채로워서 좋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슬퍼하고 더 많이 화가 나고 그래서 더 많이 행복해야지. 다채로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거다.
P.S. 오늘이 천하연재 대회 마지막 날이네요. 귓가의 연주곡을 들으며 집에 혼자 걸어오는데 이 글이 쓰고 싶었어요. 참가자분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이런 기회를 주신 키퍼님께 감사드리고 더 열심히 참가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저는 가끔씩 쓰고 싶으면 안녕 감정 시리즈를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투표해주시고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위로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저는 계속 쭉 스팀잇을 하겠지만 그래도 또 감사의 뜻을 전해요. 스팀잇만 오면 감사할 일이 많네요. 다들 굿밤 즐거운 금요일,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05 아플 때 드는 감정
06 열등감 - part 1
07 나의 무기력
08 열등감 - part 2
09 거짓 감정
10 위로에 드는 감정
11 인정 그리고 책임
12 멀어지는 교차로에 선 감정
13 이름을 불러줘요
14 타인의 삶을 시샘하며
15 집단, 결핍, 불안
16 유치한 감정의 흐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