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정] 09 거짓 감정

내가 마주쳤던 거짓 감정


02번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의 kyslmate님의 댓글의 영감을 받아 적어 내려 간 글임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솔메님:D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물론 살면서 거짓말을 종종 하게 될 때가 있지만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타입은 못 된다. 거짓말을 해봤자 금세 들켜버려서 보람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일단 난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하는 대로 투명 유리를 여과하듯이 내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다 드러내곤 한다. 그런 내게 거짓 감정이란 단어는 역시 안 어울린다. 지나치게 솔직한 게 단점이 될 망정 스스로를 속이거나 감정을 꾸며내는 일은 내게 너무 버겁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내게도 거짓 감정과 대면한 기억이 있다.

01 곡소리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없다. 할머니 역시 내게 애정이 없으셨을 거다. 우리 할머니는 지독한 남아선호 사상 주의자였고 나는 애교가 없는 손녀였다. 당연히 우리 사이엔 특별한 교감도 추억도 없다. 지병으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을 갔을 때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슬퍼야 했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할머니가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 10대였을 무렵인데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기분이 가라앉을 따름이었다. 할머니와 어렸을 적부터 같이 살았던 사촌 동생은 눈물을 흘렸고 막내 작은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되뇌며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슬픔은 전염되는 법이라 조금은 슬퍼졌지만 역시 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꽃가마 상여를 장정 여덟 명이서 메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가는 풍습이 있었다. 가끔씩 상여가 지나가는 걸 보긴 봤지만 실제로 장례행렬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얗고 빨갛고 파란 화려한 장식의 꽃가마 뒤로는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에 검은 리본을 단 며느리들이 따라가며 통곡을 해야 했다. 그중 한 명은 우리 엄마였다. (할머니는 딸이 없이 아들만 넷이었으니 행복했을 것 같다.) 엄마는 목청이 커서 단연 곡소리도 가장 크게 들렸다.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그 음성은 언뜻 들으며 매우 한이 서려있고 구슬펐다. 그 장례행렬은 두 시간쯤 걸리는 매우 고된 일이었고 두 시간 내내 곡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며느리들의 목소리는 갈라지기 시작했고 물을 마셔도 소용없을 만큼 목이 아팠을 것이다. 나는 그 연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간혹 상여가 멈추고 휴식을 취하면 그 여인 들은 발랄하게 수다를 떨었고 다시 상여가 움직이며 마치 큐 사인이 떨어지듯 억지 곡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이상한 감정의 연극을 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슬펐던 감정은 사라졌고 냉소적인 관객이 되었다. 감성이 충만했던 내게 그건 거짓이었고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었고 왜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상여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고 며느리들은 소주를 한 잔씩 나눠마시며 그 날의 일을 끝마친 인부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내 장례식에서 누구도 억지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위적인 슬픔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진심이 아닌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아이였는데 하필 또 그게 감정이라니 그런 거짓 감정이 용납이 될 리 없었다.

02 그건 사랑이 아니야.

20살 초반에 있던 일인데 누군가의 마음을 매몰차게 부정한 적이 두 번 있다. 그야말로 거절이 아닌 부정이었다. 나는 보통 누군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거절을 못하고 받아줘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증이 있었는데 그런 내가 누군가의 고백이나 감정을 거절도 아니고 부정을 했다. 내겐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명은 미국에서 만난 타이완 남자아이였는데 한 학기 동안 급속도로 친하게 지냈다. 유머 코드가 비슷해서 장난도 잘 치고 엄청 편안했다. 그 아이는 내게 '원래 한국을 싫어했는데 나랑 친해지면서 한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라는 말을 해줘서 내게 괜한 자부심과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나는 그때 같은 반인 태국인 여자애와 굉장히 친했는데 그 타이완 남자애는 그 여자애를 공식적으로 좋아했다. 수업시간 때마다 부끄럽지도 않은 지 사랑고백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 원성이 자자했다. 물론 둘은 커플이라기보단 그 남자애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가까웠다. 그 아이는 가끔씩 내게 진지한 상담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셋은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며 친밀하게 잘 지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건 6개월쯤 지나고 그 태국 여자애가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일어났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절절한 사랑고백을 하고 못내 아쉬운 이별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그 타이완 남자아이는 갑자기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나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그건 아니야.

난 그 말을 끝으로 참으로 냉정하게도 그 남자아이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우리 집 문 앞까지 와서 두드리고 나를 기다리고 진심이 담긴 편지를 줬지만 나는 끝까지 냉정했다. 어쩐지 그 아이가 너무 실망스러웠고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나 동아리 남자아이와 친해졌다. 1년 전부터 아는 사이긴 했지만 갑자기 그때 조금 친해졌다. 원래 예의도 바르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성적인 호감은 전혀 없었다. 유독 동아리방에서 자주 마주치고 그 아인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해서 둘이 노래방을 가고 대화도 많이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공강에 갑자기 놀이공원을 가자고 해서 기분파인 나는 또 아무 생각 없이 놀이공원을 갔다.(놀이공원 엄청 좋아했다) 엄청 업된 상태로 신나게 놀던 중이었는데 열차를 타기 위해 대기줄에 있는 상태에서 그 남자애는 내게 뜬금없이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했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망설이고 고민하는 내게 그 남자애는 이 줄이 끝나기 전까지 대답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그 아이는 좋은 아이였다. 데이트는 재밌었다. 처음에 그 아이에게 강한 호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길게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주일이 지나고 그 아이의 뜬금없는 고백이 아니었다면.. 어느 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니야'라며 망설이는 그 남자에게 나는 집요하게 말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 남자아이는 그 당시 내가 동아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이자 그 남자애와 1학년 때부터 친했던 M을 사실 좋아했었노라고 고백했다. 사실 M은 7년 사귄 남자 친구가 있고 M과 그 남자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을 거란 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 말을 들은 나는 더 이상 그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뭐랄까. 갑자기 뜬금없이 나를 좋아하게 된 감정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역시 거짓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마도 내가 그 남자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거다.) 굳이 왜 나를 좋아한다고 그들이 말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03 거짓 감정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감정은 자로 잰 듯 측정할 수 없고 애매하고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감정은 변덕스럽다. 어쩌면 그 남자 둘이 나를 좋아한단 말은 진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전에 나와 친했던 친구를 좋아했던 감정 역시 진심일 수 있고. 감정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누는 나의 태도가 오만했을지도 모른다.

맥락적 상황에 따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감정을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도 위선적인 일도 아니다. 가끔은 내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게 필요하고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물론 여전히 진짜 감정을 솔직히 교류하는 쪽이 편안하다.


회사가 바빠지고 삶이 점점 단순해지면서 스팀잇과 점점 멀어지고 있네요.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글을 올립니다.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05 아플 때 드는 감정
06 열등감 - part 1
07 나의 무기력
08 열등감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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