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 Cubano#4] 사랑하지 않아도 특별한 사람

알레는 거의 매일 정부가 운영하는 인터넷방에 들려 1~ 2시간쯤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mp3로 음악을 듣거나 멍때리고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나로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나쁘지 않아 처음에 묻지 않다가 문득 궁금했다.

-거기가면 보통 뭐해?
-메일 써. 친구들한테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에게 친구하자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었다.

-친구는 차고 넘치도록 많아. 더 이상 친구 만들 생각 없어.

남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조금 서운한 감정이 스쳤다. 대체 친구가 얼마나 많길래 저런 말을 쉽게도 하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제법 유명했고 세계 각국의 친구가 많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개인용 컴퓨터나 핸드폰이 없는 그는 타자치는 게 무척이나 서툴렀다. 독수리 타법으로 메일 하나를 쓰는데 1시간은 족히 걸렸다. 공책에 쓸 말을 미리 적어가나 컴퓨터 앞에 앉아 타이핑하는데 시간을 다 보냈다. 밥 값을 아껴 그는 그렇게 가끔씩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사치스러운 인터넷을 쓰다니 혀를 찰 일이지만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그 행위가 중요했으며 친구들에 대한 예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친구들에게 매번 답변을 해 줄 수 없는 노릇이고 그의 메일함에는 그의 안부를 묻거나 그를 걱정하는 메일이 아마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인터넷방에 가야했고 더 이상 친구를 만들 여유는 없었다.

알레한드로, 나는 그의 29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그를 만났다.
헝클어진 곱슬머리,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 얄상한 얼굴, 회색 빛이 감도는 크지 않지만 깊은 갈색 눈동자, 매일 정성들여 다듬는 콧수염과 턱수염, 운동을 좋아해 조금 말랐지만 의외로 다부진 체격이었고 무엇보다도 늘 자신감이 온몸에 장착된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크고 분명했고 우유부단한 모습은 찾기 어렵다.

보통 나시에 다 찢어진 청바지, 밝은 베이지색 단화를 신고 배낭여행객이 가지고 다닐 법한 백팩을 메고 다닌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에서는 반팔셔츠를 입었고 더우면 나시를 훌렁 벗는다. 그가 가진 거의 모든 소지품은 세계 각국 친구들이 떠나기 전에 선물해준 물건이었다.

알레를 구분하는 특징은 단연 타투다.

왼손가락에 정체모를 히브리어 타투가 있고 (설명을 들었지만 잊어버렸다) 오른손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고대문양이 그려져있다. 오른팔 안쪽 전면에는 커다랗게 총 그림이 있었고 특이하게도 그 위에 빨간 X자가 그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 허벅지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머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이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씌인 '가시관'을 형상화한 모양이 떡 하니 박혀 있었다. 처음 보지 못한 게 신기했다. 알레를 찾고싶으면 이마를 가리키며 '여기, 타투가 있는 남자'를 찾으면 제법 수월하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타투이스트인 친구가 그 모든 타투를 그려는데 충동적인 그의 성격을 알기에 이마에 타투만은 만류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싶었어.

그랬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교회도 매주 가지 않고 술도 마시고 섹스도 (맘껏) 하고 여자도 엄청 만나고 타투도 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믿었다. 그는 성경을 자주 읽었고 혼자 조용히 기도도 했다. 그러나 꼭 지켜야하는 종교적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진심이면 별문제가 안되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굳이 지킬 형식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십일조만큼은 꽤나 일상에 자리잡았다.

-저기 저 아저씨 보이지? 배가 고파보여. 술냄새가 나지 않아. 돈을 주면 식사를 할거야.

그는 자신에게 10 CUC이 있으면 꼭 1 CUC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었다. 가끔 돈을 달라며 술에 취한 사람이 구걸을 하면 먹을 걸 사서 건네곤 했다. 그 나름의 기준이다. 처음에는 그 광경이 낯설어 어리둥절했는데 어느새 그의 십일조 행위는 익숙해져갔다. 이상한 건 내 지갑을 통해 빠져나갔는데 아무도 내게 고마워하지 않고 그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관광객이라 돈이 많다고 생각해서 저러나 싶었는데 그는 그냥 원래 당연한 행위에는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도와줘도 생색내지 않고 도움을 받아도 멋쩍어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그는 그토록 자기확신이 가득차 있던걸까? 그것보다 더 그를 완성해주는 건 '꿈'이었다. 그는 가슴에 원대한 '꿈'을 지니고 살아온 남자였다.

-난 언젠간 이 쿠바를 떠나 세계여행을 하고 싶어. 오해는 하지마. 난 쿠바를 아주 좋아해. 더 넓은 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어.

쿠바 사람들이 여행을 갈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째, 평범한 쿠바인이라면 월급이 10만원도 되지 않았다. 생활비도 빠듯한 그들에게 비행기 티켓은 사치였다. 그렇지만 그건 두 번째 이유에 비해서는 훨씬 달성하기 쉬운 조건이다. 쿠바 정부가 (특정 나라를 제외하고는) 자국민의 외국여행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비자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다.

-어느 날 누군가 정부측 사람에게 왜 쿠바 사람들은 여행을 갈 수 없는지 물었어. 그들이 뭐라는지 알아? 글쎄, 비행기 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안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을 한다. 그는 가방 깊은 곳에서 여권을 꺼내 보내줬다. 아주 오랜 기간 돈을 조금씩 모았고 마침내 유럽에 갈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쿠바에서 여권을 갖는 건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발급조건도 까다롭고 너무 비싸다. 간신히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비자를 계속 거절당했다고 한다.

나는 화가 났어. 그러다 생각했지. 못 나가게 한다면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세계 사람들을 다 만나보겠다고. 정부 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그리고 세 달동안 그때 번 돈을 다 탕진했어. 내가 외국인들 술사주고 밥사주고 그랬지. 어차피 그 돈은 여행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어.

저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쯤에서 여행온 한국인의 돈이 없다는 투정이 그에겐 얼마나 가소롭고 가벼워보았을까. 쿠바 사람들이 가난할 건 예상했지만 그렇게 낮은 시급을 받는다는 것도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쿠바에서 당했던 자잘한 모든 사기의 역사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하고 동정심마저 들어버린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그의 꿈과 열정의 역사는 나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그리고 아마 나처럼 그의 꿈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알레, 만약에 말이야. 내가 그 꿈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도울게.

뭐 그의 대답은 정말로 그 다웠지만

풋. Stella 네 도움같은 건 필요없어. 내가 필요한 건 아버지(God)가 다 주실거야.


알레한드로, 음치 주제에 길거리에서 늘 노래를 흥얼거렸다. 랩을 아주 좋아했는데 정말 끔찍했지만 본인은 흥에 취해 길거리에 멈춰 서서 잠깐 춤을 추곤 했다. (정말 너무 부끄러웠다) 쿠바 사람이라고 다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아니다. 또한 쿠바 사람이라고 다 살사를 잘 추는 것도 아니다. 기꺼이 가르쳐 줄 수준급 프로 친구들은 아주 많았지만 그냥 막춤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단다. 그 춤이 제법 멋졌다는 건 비밀이다.

길가에 멈춰 10원짜리 쿠바 커피를 홀짝이는 내게 커피가 맛있냐고 묻던 커피는 입에 대지도 못했던 사람.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그게 뭔지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 가장 지루한 장소에서도 순식간에 재밌는 장난과 놀이를 찾아내는 사람, 사람에게 늘 둘러쌓여있다가도 혼자만의 고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가진 게 없어도 주눅드는 법이 없던 사람. 미안하단 말도 고맙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고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고 정부 욕을 서슴없이 해대던 사람.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언제나 긍정적이던 사람. 29살의 알레한드로를 만났고 아마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그는 내게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Mi Cubano 시리즈
[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
[Mi Cubano#2] 예고된 불협화음의 시작
[Mi Cubano#3]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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