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유치한 다툼의 반복이 이야기의 7할을 차지한다. 그다지 아름다운 성격은 아니라서 쓰는 것만으로도 지쳐버리곤 했다. 그래서 그동안 쓰다 말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거리를 두지 못한 채 기억 속에 휩싸여 다시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나곤 했다. 지치고 부끄러워진다.
지금은 우리가 왜 그렇게도 싸웠는지 구체적인 이유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지독히도 안 맞았다. 단순 성격의 차이일 수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랐다는 환경의 차이 그것도 아니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틈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상황은 우리를 몰아붙였고 짧은 시간 내 더욱 피 터지게 파열음을 내도록 했다. 그리고 이 굉장한 에너지 충돌이 오히려 서로에게 깊이 빠지도록 만든다.
우리의 첫 싸움은 둘째 날 벌어진다. 그리고 그건 돈 때문이었다.
산티아고데 쿠바를 간다면 으레 가야 하는 관광지가 있다. 바로 모로성이다. (아바나에도 모로성이 있다. morro-언덕) 그는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고 택시비는 왕복 30 CUC에 달했다. (1 CUC=1 USD)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는 택시기사와 한참 실랑이 끝에 25 CUC의 협상가를 제시했다. 내가 13 CUC, 그가 12 CUC을 냈다. 나의 찝찝한 기분은 모로성에 도착한 순간 잊힌다.
그곳은 평화 그 자체, 모든 원망과 부정적 에너지를 포용해 주는 마법 같은 장소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돌담에 앉아 서로 혼자 남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내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은 내가 그 장엄한 풍경의 한 페이지로서 실존할 뿐이었다.
잠시 내 옆에 앉은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 있었다. 그 고요함이 낯설었다. 목소리도 크고 항상 떠들썩한 그가 그토록 차분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이질적이란 생각을 했다. 알레는 사진기에 찍히는데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에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기에 그건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테고 내가 잊는다면 그날은 없던 날이 된다. 그래서 그 기억을 담기 위해 한동안 그와 바다를 함께 바라봤다. 그에게 고마웠다.
그 평화는 1시간의 제한시간이 있었다.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 아쉬운 마음에 내가 말했다.
"아.. 가고 싶지 않아. 계속 여기서 바다를 보고 싶어."
"그렇게 좋아?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그곳에 갈 일은 없다는 걸. 그 평화로운 시간은 거기서 끝이 난다.
세상에는 몰라도 좋을 사실들이 많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우연히 다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은 모로성에 버스를 타고 훨씬 저렴에 가격에 갈 수 있으며 내가(사실 우리가) 낸 택시비는 역시 너무 비싸다고 했다.
나는 당시 지금보다 훨씬 충동적이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 감정을 꼭 분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그 길로 그에게 달려가 경멸의 눈빛으로 따져대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 말해줬어! 그 택시비는 너무 비싸다고! 너 혹시 커미션을 챙긴 건 아니야?"
그리고 그 역시 불같은 감정의 소유자였다.
"무슨 소리야!! 나도 12 CUC이나 냈다고!! 아까 우리 택시비보다 저렴하게 갈 수 있다고??? 내 눈앞에 그 사람을 당장 데려와!!!"
길거리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 나는 툭 눈물이 흘렀다. 13,000원 상당의 돈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싸우고 있는 내 처지가 너무나 우스웠다. 나는 한 번도 돈 때문에 누군가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서러웠다. 그러나 그 당시 돈은 내 생존과 직결되었다.
나는 엉엉 아이처럼 울면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이에게 신세 한탄을 한다.
"의심해서 미안해. 그냥 내가 너무 걱정되고 초조해서 그래. 매일 밤 돈을 계산한 후 잠이 들어. 난 돈이 없다면 길바닥에 나앉게 돼.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너무 두려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내 한탄을 한참 듣던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위로한다.
"Stella,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네가 돈이 없으면 누군가 널 도와줄 거야. 내가 저렴하게 local 사람처럼 먹고 노는 법을 알려줄게."
기대하지도 않던 사람에게 위로받게 되면 그 효과는 어마무시하다. 나는 눈물을 멈추고 퉁퉁 부은 눈으로 순순히 그를 따랐다. 로컬 사람들만 갈 것 같은 고기와 밥을 도시락처럼 파는 식당과 돌로 만든 투박한 인테리어에 그냥 넓은 집 앞마당 같은 술집을 가게 된다. 그리고 가격은 여행자 물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했다.
기다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합석은 필수였다. 외국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담긴 눈빛은 금세 잦아들고 옆의 여자분이 친근한 얼굴로 과자를 건넸다. 호의였다. 그 모든 것에 고마웠다. 저렴한 플라스틱 잔에 담긴 정체 모를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주량 약한 내가 취하기 충분했다. 살면서 거의 매일 맥주를 마신 건 쿠바에 있을 당시다. 그 이전까지는 정신 취하도록 마시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당시엔 맨정신으로 깨어있는 게 불가능했다. 쿠바는 날 취하게 했다.
알레는 가이드 기질은 영 없다. (물론 나의 가이드는 아니지마는) 그는 그다지 날 신경 쓰지 않는다. 내 기분이 어떤지 내가 그곳을 맘에 들어 하는지는 하등 중요치 않았고 그가 무얼 하고 싶은 지만이 그의 관심사다. 그때는 그걸 잘 몰랐다. 그래서 그냥 그가 안하무인에 이기적인 놈으로만 생각됐다.
그는 나 없이 그 술집에서 한참 즐기다 돌아와서는 천진난만 얼굴과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15 CUC만 빌려줘! 맘에 드는 MP3를 찾았어!"
그 순간 내가 받았던 모든 위로가 모두 거짓이란 생각이 든다. 그건 불과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고 아직도 내 눈은 부어있는데 모든 자존심을 버린 진심어린 호소는 그대로 개무시당했다. 표정이 굳어 난 그 술집을 황급히 떠났다. 그는 날 따라 나와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그래?"
"야 이 새끼야! 이거나 먹고 꺼져!!!"
충만한 감정은 그대로 화로 분출된다. 전 재산을 그의 얼굴로 던졌는데 더욱 비참한 사실은 그 전 재산이 7 CUC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엉엉 울며 걸어갔다. 그는 강한 힘으로 날 돌려세웠다.
"미안해.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 미안. 그냥 난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미안해"
그는 강제로 내 양팔을 붙들고는 외면하는 나의 눈을 끈덕지게 마주친다.
그건 곤란하다. 그의 눈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자 면죄부다. 그가 아무리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고 내게 상쳐 입혀도 내가 죄인이 되게 만드는 그런 눈이다. 순수하고 죄가 없고 애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해줘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눈이다. 그때 그 눈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완전히 지쳐 집에 가야겠다고 했고, 그는 불안한 지 몇 번이나 다시 자기를 만나러 올 것인지 확인을 받은 후에야 날 놔줬다.
사실 난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싸움의 모든 원인이 내게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나의 마음이 문제였다. 이 슬픈 현실은 구질구질한 내 처지를 만들어냈고 그 처지를 어찌할 줄 모르고 악화시키는 내가 있었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 설명을 굳이 그에게 하지 않기로 한다.
물론 난 감정적으로 안정되고 단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나의 정신은 낯설고 당황스러울 만큼 쉽사리 손상되곤 했다. 너무 쉽게 흔들리고 중심을 벗어나 내 손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 취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알레는 남의 감정에 무신경하고 늘 행복하고 긍정적인 남자였다.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예고된 순서였다. 그리고 쿠바라는 장소는 우리의 불협화음을 증폭시켜주는 기폭제가 된다.
Mi Cubano 시리즈
[Mi Cubano#1] 첫 만남 - 난 생각보단 괜찮았고, 넌 날 쉽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