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기 '마음에도 면역력이 있다면 프로바이오틱스라도 먹고 싶다.'

마음이라는 현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속으로 삭이고, 주장하기보다 움츠러들어서 힘들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속상한 마음을 곧 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잘 알면서 도대체 왜 힘들어할까? 예상치 못한 사건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는 찾아나갈 수 있었다.

나는 S와 업무관계로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명문으로 손꼽히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계획했던 일이 잘 안 되어서 좌절도 했지만 새롭게 방향을 잡고 나아가고 있었다. 우린 공유할 수 있는 가치 때문에 함께 일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반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일어났다.
S는 계약서에 없는 일을 해달라고 했다. 어렵지도 않고 품도 거의 들지 않아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 번 해 보고 나니 작은 일도 전체 과정에는 부담을 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품이 들지 않는 일이라 해도 금전을 주고 받는 중요한 일을 도급 계약으로 일하는 내게 쉽게 넘기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날 바로 메신저로 문제를 제기했다. S는 불쾌했던 모양이다. 메신저에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어렵겠다고 생각해서 3일 뒤에 대면하여 대화할 것을 요청했고 약속을 잡았다. 다음날 S는 다른 사람을 통해 약속을 취소하고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약 한달 후의 다른 자리에서 S는 내가 불만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며 탓했다. SNS에는 자신이 같이 일하는 '누군가'에게 공연히 비난을 받았으며, 그 누군가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써 놓았다. 무엇이 비난이었을까? 업무 진행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는데 자신을 비난했다고 하는 반응이 황당했다.

도대체 내가 한 말의 어디가 비난이었을까? 어디까지가 비난이고 어디부터 비난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혼란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단서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확실하게 알지 못했던 어떤 개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1]이었다.

고전적 정신분석에서 현실검증력은 '환상'과 '현실'을 분별하는 능력[2]을 뜻한다. 현대적 정신분석인 대상관계이론(object-relation theory)에서는 '나의 것'과 '외부의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3] 현실검증력이란 마치 신체의 면역력과 같다. 내 몸과 내 몸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 대체로 외부의 것은 내부의 것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면역체계는 외부의 것을 구별하고 거부하고 파괴한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내게 피해를 주는 외부의 것을 구별해서 처리해야 한다. 현실검증력의 기능이 잘 안 된다면 무엇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어 진다.

살다보면 잘 못 한다고 혼도 나고 탓을 들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불편하다. 내가 작아지고 너무 못 했다는 생각에 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말'에 대해 따져본다. 인정할 사실은 인정하게 되고, 자신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자책은 반박하거나 옳지 않은 근거를 찾게 된다. 들었던 말(외부의 것)의 영향력은 점차 엷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있었는지조차 기억도 안 난다.
현실검증력이 작동하지 않으면 외부의 것을 물리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에 박혀 나에 대한 어떤 진실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끊임 없이 반복되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와 자책을 더욱 깊게 한다. 마침내 내가 나를 비난하는 악순환이 완성된다. 이쯤 되면 처음에 들었던 말(외부의 것)과 반복되는 자기 비난(나의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말도 비난으로 마음 속에 들어온다. 면역력이 강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던 병균에 약해진 몸과 같다. 현실검증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저 조금 불편하게 여기고 그냥 넘길 말들도 나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요 원색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검증력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나 프로바이오틱스라도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먹으면 되니까.


1회기 '마음 또한 현실'
☛ 2회기 '마음에도 면역력이 있다면 프로바이오틱스라도 먹고 싶다.'


  1. 미국의 정신분석가 Charles Brenner가 저술한 교과서인 'An Elementary Textbook of Psychoanalysis'에 언급된 내용을 단순화 시켜서 제시하였다. 한국어 번역본은 '정신분석학'(이근후, 박영숙 역 / 하나의학사)이다.

  2. 1번 미주의 책에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극들이나 지각들을 분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초아의 소망과 충동에서 일어나는 자극, 지각들을 분별하는 자아의 능력'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알고 보면 쉬운 걸 참 어렵게도 써 놨다.

  3.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N. Gregory Hamilton의 책 'Self and Others: Object Relations Theory in Practice'에서 인용했다. 현실검증력의 정의를 제시하진 않았으나 4장에서 자아의 주요한 기능으로 분별과 통합을 언급했다. 한국어 번역본은 '대상관계 이론과 실제-자기와 타자'(김진숙, 김창대, 이지연 공역 / 학지사)다. 물론 난 영어가 힘들어서 번역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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