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 불안, 슬픔, 공허, 초조함, 절망, 분노, 무의미함.
기쁨, 환희, 열정, 즐거움, 따뜻함.
이것들은 세상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뒷산 산신령'이란 개념처럼 머리 속에만 있을까? 좋다. 있는지 없는지 복잡한 논쟁은 집어치우고 내 얘기를 해 보자. 제법 오래 전, 난 위에 열거된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살지 못했다. 경험이나 하고 있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상담실에는 힘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상담실이 아닌 네이버 지식인의 '고민' 분야 같은 인터넷 공간에도 힘든 사람들이 글을 올린다. 분명히 힘들어서 찾아오고 괴로워서 글을 쓴 사람들이 이런 말과 글을 던진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은 데 이런 걸로 제가 힘들어 해도 될까요?'
'기운이 없고 할 일을 잘 못 하는 건 제가 게을러서 그런 거에요.'
힘들지만 힘들다고 편히 인정하지 못하는 기색을 보인다. 어쨌든 누군가에겐 말하거나 티라도 내지 않았을까? 삶의 궤적을 함께 살펴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그 정도는 견뎌내야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복에 겨운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최악은 아니었지만 복이 넘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러웠다. 그러나 가정 환경이 괜찮았고 뚜렷한 불행의 징후는 없었기 때문에 힘들어 할 자격이 없었다. 나의 고통은 존재 자체를 인정 받지 못했다.
마음의 고통에서 눈을 돌린 댓가는 상당했다.
견뎌 내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스스로에게 했다. 살다 보면 브레이크가 필요한 법. 그러나 힘들어도 견뎌 내야 했기에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았다. 곧 지쳐 버렸다.
더 슬픈 건 따로 있었다. 처음에 힘들게 한 그 무엇도 고통이지만, 나의 고통이 거부당하는 것 자체가 정말 슬펐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건 마음으로 존재하는 내가 부정당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실체는 힘들다고 하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면, 고통을 호소하는 그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아닌 건가?
그래서 그럴까. 자신의 고통을 편히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이 비어 있고 공허하다는 말을 했다. 이상한 일이다. 당신은 분명 내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실체가 분명한 사람인데 비어 있고 공허하다니. 어디가 비어 있을까? 사실 비어 있지 않다. 분명히 고통이 가득 차서 넘치는 중이다. 그러나 인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시선을 거두었기 때문에 마치 없는 듯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몸을 통해 물리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몸이 건강하도록 적절한 영양 섭취와 수면, 휴식 등이 필요하다. 몸이 있다는 것을 잊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구 굴려서 결국 죽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편으로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심리적인 세상에서 살아간다. 경험하고 느끼는 마음과 닿아있지 못할 때 공허감 속에서 말라가게 된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부디 그 누구도 끝까지 가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물리적 생존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가끔 마음이 있음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저 사람이 기쁨과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신만의 열망이 있음을 잊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힘들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면 그럴 때가 아니라 하고 취업준비 중이면 무기력할 틈이 어디 있냐고 한다.
마음 또한 나의 현실임을 편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내담자들을 만날 때 지난날의 힘들었던 내가 생각난다. 분명, 마음 또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