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날 경기 분위기는 3회초 이전과 이후로 정확히 갈렸습니다. 3회초 이전까지는 10대1, 이후는 11대 1. 사회인 야구에만 존재하는 '출석률의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 날 경기는 루키리그 경기였습니다. 제가 소속된 A팀은 2부리그와 루키리그 두 개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부 리그는 회원들의 경기력 중심으로 승부 위주의 경기 운영을 하고, 루키리그는 신입 회원을 포함한 모든 회원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경험을 쌓도록 배려합니다.
3회초가 끝날 무렵, 시작 후 한 시간 정도가 흐른 시점입니다. 이 때부터 감독의 머리는 복잡해집니다. 사회인 야구 리그 경기에는 1시간 50분 이후 새로운 이닝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시간 제한 규정이 있고, 4회 10점이라는 콜드 게임 규정도 있습니다. 선수(특히 투수) 보호와 원활한 리그 운영을 위한 장치죠. 스코어는 10:1. 지금까지 전승을 기록했던 팀답게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출석률이 높아 덕아웃에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이 여럿 있습니다.

저희 팀 공격 때 쉬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모델이 된 후배 얼굴은 슬쩍 블러 처리했습니다.^^
감독은 결단을 내립니다. 이 분위기로 한 회를 더한다면 콜드게임으로 끝날 공산이 크기에 대기 선수들에게 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죠. 투, 포수와 3루수, 좌익수를 아웃시키고 우익수를 투수로, 좌익수를 우익수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3회말. 이 때부터 대재난이 시작됩니다. 시작은 포수부터였습니다.
새로 바뀐 포수가 경험이 일천해 땅볼 블로킹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겁니다. 어깨가 좋아 주로 3루 수비를 보는 친구로, 백업 포수로도 경험을 쌓기 위해 출전시킨 건데요. 땅볼 블로킹이 안되다보니 낮은 볼 투구에 부담을 느낀 투수의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사사구가 많아지면서 수비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경험 없는 3루수의 에러가 연속되고, 다시 투수가 흔들리는 일파만파의 악순환이 끝까지 계속된 겁니다.

좀더 넓게 앵글을 잡아봤습니다. 경기 내용과 상관없이 날씨가 참 좋죠? ㅋ
저도 반성할 부분이 있습니다. 수비 시간이 길어지고 심리적으로 쫓기다 보니 3회 이후 타격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한 겁니다. 이 날 저는 1루수로 3번 타순에 배치되었는데요. 이 날 기록을 보시면 저 역시 3회 이전과 이후의 타격 컨디션이 극과 극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올해로 사회인 야구 15년차에 이 날 중심 타선에 배치됐던 걸 감안하면 반성해야 마땅한 부분입니다. 전체 11득점 중 2타점이라니... 야구 영양사들의 질타를 받아 마땅한...ㅠㅠ

결국 경기는 5회말 끝내기 안타를 맞는 것으로 종료되었습니다.ㅠㅠ 이제 남은 일은 애프터서비스(?). 경력이 쌓이면서 승부에 대한 집착이나 관심은 거의 없어졌지만 어린 친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경기 후 미팅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후배들의 코가 길게 빠져 있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에러를 포함해서 네 번이나 실수를 한 신입 3루수와 미숙한 블로킹으로 역전의 빌미를 제공한 포수, 그리고 극심한 난조를 보인 투수를 다독이지 않으면, 자칫 전체적인 팀 분위기까지 해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경력이 오래된 40대 선수들(솔직히 사회인 야구는 40대가 제일 잘합니다.ㅋㅋ)을 중심으로 갖가지 자학 개그가 펼쳐지고 간신히 분위기를 띄운 상태에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

햇수로 15년을 함께한 헬멧 그리고 사회인 야구 5주년 기념으로 주문 제작해서 이제 10년째 접어드는 1루 미트. 팀로고와 제 배번, 이름 그리고 함께한 세월이 새겨져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들입니다.
시간은 어느덧 5시 30분. 여왕님과 연락을 합니다. 토요일은 저에겐 ''야구의 날'', 여왕님에겐 ''첼로의 날''입니다. 연락을 해보니 레슨을 마치고 연습실에서 연습중이라는군요. 집에 들러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여왕님을 만나 시원한 메밀면으로 식사를 마친 다음, 동네에 있는 LP펍 '테이크 파이브'로...
이 곳은 여왕님 연습실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명실상부한 참새방앗간으로, 한동안 잊고 지내다 그저께 읽은 그래퍼님( @grapher )의 글 "우연히 만난 추억의 흔적, 일산 LP-Pub 'Take 5' " 덕분에 생각이 떠올랐네요.
가게에 들어서기 전에 잠깐 재밌는 일도 있었답니다. 주차장에 차를 넣고 화장실에 들러 나오는 길에, 잠시 전 투구 난조로 졸지에 패전 투수가 된 팀 후배 녀석을 가게 앞 인도에서 마주친 겁니다. 정확히는 어딘가를 향해 화난 사람처럼 걸어가던 녀석을 제가 불러 세운 거군요. ㅋㅋ 일산 사는 친구긴 해도 인구가 100만인 도시에서 이렇게 마주치긴 쉽지 않습니다.

일산 대화동에 있는 LP펍 "테이크 파이브". 안팎의 분위기나 가게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래퍼님께서 훌륭한 글로 소상히 설명하고 계시니 여기 를 클릭하셔서 "선 보팅 후 숙독''해 주세요~^^
"어? OO~ 여긴 왠일이야?"
"어? 형! 형은 왠 일? 나는 감독님이랑 술 한 잔 하러... 형도 같이 가요~"
악수하던 제 손을 막무가내로 잡아 끕니다.
"야,야, ㅋㅋㅋ 나 집 사람이랑 같이 있어~"
"형수님? 형수님은 어디 계셔? 형수님도 같이 가면 돼지~"
"하하, 알겠는데... 오늘만 봐 줘라~"
"알았어요. 나는 오늘 좀 마셔야겠어~ 형은 어디 있을거야? 여기? 분위기 좋아보이네~ 근데 형, OO고등학교가 어디야? 감독님 그 앞 어디에 있다던데..."
"쪼기로 50미터만 가면 돼. 기분은 이해하나 적당히 마셔~ 가정의 평화는 야구 롱런의 기본! 알지?"
"예~ 형~ 형도 형수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형수님한테 안부 전해 주시구요~"
대화를 보셔서 알겠지만 성격 무지 급한 마초 중의 상 마초입니다. ㅋㅋ 그렇게 그는 예의 종종걸음으로 떠났고 마침 손을 씻고 나온 여왕님에게 내가 뜬금없이 싱글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게로 들어섰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저희 외엔 손님이 없더군요. 그 시간부터 손님으로 거의 꽉 찼던 새벽 1시까지 재즈에서 하드록, 모던록, 추억의 팝, 인디록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새겨진 음악들을 신청해 들으면서 참으로 알찬^^ 시간을 보냈고, 평균 1시간에 1병씩 총 10병의 빈 맥주 병이 하나들 줄을 섰답니다.




그렇게 다섯 시간 가까이를 보내는 가운데 몇 시간 동안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 LP바에 와서 힙합 곡을 여러 곡 신청하고선 연이어 틀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 심수봉 등등 트로트만 고집하는 사람, 추억의 "로라장(롤러 스케이트 장)" 음악을 돌아가며 신청해서 괴성에 가까운 소리로 따라 부르는 만취객 일행, 부부인지 친구인지 갑자기 말다툼을 벌이다 활극 직전까지 가는 커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네요.
그럴 때마다 저희에게 난감한 눈짓을 보내거나 사과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장님에게 '연민의 정'도 살짝 느껴지더라는...ㅎㅎ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생각보다 일찍(?) 대리기사님의 답신이 온 탓에 저희는 쫓기다시피, 살짝 아쉽게 자리를 떴는데요. 저희 부부에게 사장님이 미소와 함께 해 주신 한 마디가 마음에 남습니다.
"두 분이 이런 음악 같이 좋아하는 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답례 삼아 "네, 워낙 오랜 시간 같이 지내다 보니...^^"라고 말씀드렸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잠시 잊고 살았던 듯합니다. 클래식 매니아였던 여왕님과 롹 덕후였던 제가 만나 20년 세월 동안 서로 주고 받고 서로 동화되어 가면서 만들어진 결과니까요.
연휴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저는 7시에 깨서 두 시간 째 쉬엄쉬엄 이 글을 쓰고 있고 한 시간 전 쯤 일어난 여왕님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도 글을 마무리하고 도우러 가야겠네요.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남은 연휴 가족들, 또는 소중한 분들과 귀한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누군가와 만나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 추억을 함께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삶을 걸 만한 일이니까요.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뵙겠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