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잠시 생물책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분야는 유전자 관련 내용이었는데, 고등학생 시절엔 내가 문과에 속해 있어서 못 배운 것인지, 아니면 그땐 아직 유전자 부분이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던 시절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대학에서의 내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는데 이 역시 생물과는 관련이 없었기에 나에게 있어 유전자에 대한 지식은 '복제 양 돌리' 또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정도에서 끝나버렸다. 그래서 작년에 생물책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돌리가 탄생한 지 21년이 지났고,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종료된 지 15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전자 분야가 흥미로웠던 이유는 유독 그 부분이 컴퓨터 공학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mRNA의 전사와 수송은 TCP/IP Protocol에서의 data encapsulation/decapsulation을 떠올리게 했고, mRNA의 번역 방법 또한 프로그래밍 시 쓰는 기법과 같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먼저 하려 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려고 한다. 언젠가 mRNA와 data en/decapsulation에 대한 비교 글과 생물체의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비교 글을 써봐야겠다.
앞서 말한 대로 mRNA의 전사, 번역, 수송 방식이 컴퓨터 공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닮아 있어,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갑자기 이 모든 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 있어 보이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오래전 쓰인 책보다는 새로 발간된 책을 찾았다. 오늘 소개하는 책 <궁극의 생명>도 그 중 하나다.
<궁극의 생명>은 당대의 유명한 유전학자, 이론생물학자, 생명공학자, 이론물리학자, 천문학자, 양자역학 공학자, 화학자, 미래학자, 로봇학자의 강의와 대담을 엮은 책이다. 주로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 기술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에 대한 예상인데, 이 강의와 대담이 2000년~2015년에 행해졌기 때문에 지금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번역자가 주석으로 현재의 정보를 달아 놓았다.
책의 초반은 조금 지루한 편이다. 지루했다기보다는 한 편의 강의에 담긴 내용이었기에 수박 겉핥기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단발성 세미나보다는 오랫동안 조금 더 주제를 파고드는 연속된 강의를 듣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이어 흥미로운 내용이 이어져 이곳저곳에 줄을 그어가며 읽었는데, 서평을 쓰는 이 순간은 대체 어느 문단을 인용구에서 배제해야 하는지 고민일 따름이다.
견해 차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과학자 간의 견해 차이에 대한 태도였다. 그 한 가지 예는 '자연 선택'에 대한 것인데, 리처드 도킨스는 선택의 표적이 '유전자'라고 주장하는 반면, 에른스트 마이어는 '개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실명을 거론하며 상대방의 이론이 틀렸다고도 한다. 상대방의 비난에 감정부터 상할 법도 한데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신기했는데, 아래의 글을 보자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과학은 동의하는 것은 제쳐두고 견해 차이가 나타나는 주제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입니다. 모두가 모든 것에 동의하는 과학은 죽은 과학이에요.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나?
우리는 왜 살아갈까?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았다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 하고, 그것의 가장 쉬운 방법은 자손을 낳는 것이었다. 인류는 이제까지 여러 방법을 통해 지식을 전달했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소수의 사람만이 대중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지금은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유튜브로 영상을 공개하는 등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도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고, 앞으로는 어떤 방법이 되었든 더 편해질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미래의 출산율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까?
저장 가능한 것
영화 <루시> 때문일까? 아니면 컴퓨터의 메모리와 디스크를 사람의 뇌에 비유해서일까? 미래에는 뇌에 담긴 정보가 데이터로 저장되고, 몸은 기계로 대체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로는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에 대한 정보만 저장할 수 있고, 뇌의 동작 방법은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몸을 재구성하는 기술과 뇌에 담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 중 먼저 실현되는 기술은 무엇이 될까? 언젠가는 죽지 않기 위해 냉동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기록하는 날이 올 것 같다.
유(有)
내가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답은 사실 어느 책을 읽어도 구할 수 없다. 이제까지 알려진 우주의 기원은 빅뱅이었고, 빅뱅의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유(有)였을까? 창조자가 있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을까? 그런데 창조자가 존재했다면, 이미 그 시점이 무(無)가 아니다. 그냥 아래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만물에 자연적인 원인이 있다는 다윈의 설명 앞에 창조적인 우월한 정신에 대한 믿음은 전혀 필요 없게 됩니다.
가까운 미래에 누가 속시원한 답을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내 전공이 컴퓨터다 보니 책 내용 중 진화학보다는 컴퓨터와 관련된 미래에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서평을 남길 것이라 예상된다. 특히 관심이 가는 내용을 썼던 몇몇 학자의 책은 따로 찾아서 읽을 예정인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직 <종의 기원>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유명한 제목이라 그냥 간과하고 있었나 보다.
생물, 천문학, 컴퓨터공학, 물리학, 화학 등 여러 방면의 주제가 나오다 보니 세세한 내용은 이해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정도만 파악해도 좋을 것 같다. 수능을 마친 고3, 또는 교양으로 과학, 공학을 접한 대학생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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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의 미래. 재밌지 않은가?
지금은 나무를 길러서 베어낸 다음에 탁자를 만들지요. 앞으로 50년 뒤에는 그냥 탁자를 기르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