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커피 #10.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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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지께서 제일 자주 언급하셨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읽고자 하면 아직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엔 무리라며 조금 더 큰 후에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게 싫었던 나는 결국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말 그대로 ‘읽었고’, 혼자 뿌듯해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말리시는 이유가 어린 나이에 따른 ‘지성’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은 ‘경험’의 문제였던 것도 같다. 이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공과 관련 없는 책들과는 거의 담을 쌓았고,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이번 책으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선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인도 여행을 통해 인도 문명과 종교에 관심이 생긴 탓도 있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는 것이 마음 한편에 숙제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이 ‘싯다르타’인 만큼, 당연히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의 일생과 불교의 말씀을 다룬 소설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의외로 부처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닌, 동명의 주인공 싯다르타의 성장 소설이었다.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학문에 능하고, 예의 발랐으며, 매일같이 명상하고 종교 의식을 치르지만, 주위의 그 누구도 해탈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아를 벗어나기 위해 부귀와 계급을 뒤로한 채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沙門)이 되어 집을 떠난다. 당시의 싯다르타는 아래와 같이 비록 정신적으로는 고고했을지 몰라도 사람에 대한 이해와 연민은 없는 자로, 또한 자신만의 이상 세계를 꿈꾸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여자들과 부딪칠 때면 그의 눈초리는 얼음처럼 싸늘해졌고, 호화롭게 치장한 사람들에 뒤섞여 도시를 지나갈 때면, 그의 입가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장사하는 상인들, 사냥 가는 귀족들, 죽은 자를 애통해하는 상제들, 몸을 파는 창부들, 환자 때문에 애쓰는 의사들, 파종의 날을 맞추는 승려들, 사랑하는 애인들,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들을 보았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에게는 거들떠볼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모든 것은 악취가 났다. 거짓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마치 의미 있고 행복하며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보증할 수 없이 썩어 없어질 것이었다. 세상은 쓰디쓴 맛이었다. 인생은 번뇌였다. 하나의 목표가, 단 하나의 목표가, 싯다르타 앞에 세워졌다. 그것은 해탈(解脫)이었다. 갈증에서, 욕망에서, 꿈에서, 기쁨과 슬픔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자아(自我)를 벗어나는 것, 텅 빈 마음에서 안식을 찾는 것, 자아를 벗어난 사유(思惟) 가운데서 기적을 만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자아 일체가 초극되고 소멸되었을 때에, 가슴속의 모든 욕구와 충동이 침묵할 때에, 비로소 가장 궁극의 것, 이미 자아가 아닌 본질 속의 가장 심부의 것, 위대한 비밀이 깨어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문이 되어 몇 년간 고행하던 그들은 석가모니인 고타마를 찾아 떠났고, 그의 설법에 감동한 고빈다는 고타마의 교의에 귀의(歸依)하는 반면, 싯다르타는 지식은 전해질 수 있으나 어느 누구도 단지 설법을 듣는 것만을 통해 해탈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혼자 그곳을 떠난다. 이후 당연히 또 다른 수행을 할 것이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도시로 향했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기생, 카마라에게 반하게 된다. 그녀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신의 장점이 돈과 명예가 아닌,
"나는 사고(思考) 할 수 있소. 나는 기다릴 수 있소. 나는 금식할 수 있소."라고 말하는 싯다르타에게 카마라는 상인이 되어 돈을 벌어올 것을 요구하고, 결국 그는 그렇게 상인이 된다. 이후 그는 여전히 자신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장사는 자신의 일이 아닌 취미 정도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또한 금전에 대한 욕심을 가졌고, 술과 고기, 욕정, 그리고 결국에는 도박에까지 빠져들고 만다.

어느 날 몇 가지 사건을 통해 그간의 삶이 비참하고 수치스럽다고 느낀 싯다르타는 도시를 떠나 강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옴"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바수데바라는 뱃사공과 함께 생활하고, 그를 따라 매일같이 노를 젓고, 강을 보고, 강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결국 영원히 흐르고 항상 새로운 물이 흐르지만, 또 언제나 같은 강임을 통해 대상을 볼 때 시간을 제외하는 법을 알게 된 그는 이 세계 또한 시간을 제외하고 바라보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 태어났던 때와 죽음에 이르른 때는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같은 것으로, 사람과 사람은 물론 돌, 흙, 부처, 그 모든 것이 같은 것으로, 세계는 순간마다 완전하고, 모든 것이 선이며, 모든 것이 범(梵)임을 깨닫게 된다.


싯다르타가 육식을 하고 술과 여자를 즐기며, 도박까지 한다는 설정은 굉장히 의외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마지막에 고빈다를 만나 전하는 대화를 통해 풀렸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사랑하게 된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실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꿈꾸는 어린 날의 싯다르타가 아니었다.

이 책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는 부처 고타마, 주인공 싯다르타, 그리고 뱃사공 비수바데로, 그 셋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으나 결국에는 모두 깨달음에 이른다. 의외로 불교에 귀의한 채 스님이 된 고빈다는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데, 이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두가 같은 설법을 듣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의 범위 내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사고를 하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기듯이 이러한 감정의 바닥에까지, 원인(原因)이 쉬고 있는 밑바닥까지 빠져들어갔다. 원인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곧 사고(思考)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고를 통해서만 감정은 인식으로 화하며, 소멸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되어 감정 속에 내재한 것을 발산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몇 해 동안 순간적으로 우울감이 다가올 때가 있었다. 나는 그 감정의 원인을 찾고 마음을 다스리기보다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에게 나의 우울함을 호소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읽은 책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가끔은 책에 쓰인 문장이, 또는 느릿느릿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내 마음을 다시금 정리할 기회를 주었다. 며칠 전 다시금 우울감이 문득 찾아왔지만,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우울한 감정에 도취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필요함은 잊지 말아야겠다.


아래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다. 우리는 비록 해탈하지 않았으나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시선을 돌린다면, 해탈한 싯다르타와 같이 아름다운 태양과 노을, 풍경을 느낄 수 있으며, 계절의 향기 또한 맡을 수 있다.

이제 해탈된 그의 눈은 이 세상에 머물러 모든 것을 보고 가시적인 현상을 인식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고, 다시는 본체를 추구하거나 저 세상을 겨누지 않았다. 무엇을 구함이 없이, 단순하게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웠다. 달과 별은 아름다웠다. 시내와 강 언덕도 아름다웠고, 숲과 바위도, 산양(山羊)과 갑충(甲蟲)도, 꽃과 나비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이렇게 각성되어,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렇게 의심 없이 세상을 걸어간다는 것은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머리 위의 태양도 다르게 불탔고, 숲속 그늘도 다르게 서늘했고, 시내와 연못, 호박과 바나나도 다른 향취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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