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시를 기다리며

요즘은 걱정이 많은지, 장시간 집중해야 하는 독서를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책을 읽다가 20분도 안 되어 내려놓았습니다. 리뷰를 써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걱정이 많아 책을 못 읽어서 걱정이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책이 안 읽혀서 걱정입니다. 리뷰를 쓰지 말까?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출판사 책이라서 리뷰는 써야 합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걱정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탁월한 나하입니다.

책읽기에 집중이 안 되어 최근 온 책들의 머릿말과 제목만 뒤적거렸습니다. 오랜만에 시간이 생겼거든요. 거의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시간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생기니 이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갑자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최근에 온 책들을 들고는 갑자기 목차만 읽습니다. 갑자기 제가 불성실해 보였습니다. 너무 갑작스런 제 모습입니다.

제가 일하고 글쓰고 책보는 방은 골방같은 작은 방입니다. 집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해서 와이파이도 안 닿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딴청을 부릴 수 없고 책을 읽고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방입니다. 아주아주 오래전엔, 내 집이 생기면 골방을 기도실로 쓸 생각이었습니다. 사람 한 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자그마한 방에 방석 하나 깔고 십자가 하나 걸어놓고 성경책 한 권 내려놓으면 딱 좋은 풍경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골방은 창고와도 같습니다. 책상 의자에 앉기도 힘들 정도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버렸습니다. 치우고 버리고 치우고 버리고. 드디어 문을 열고 책상까지 가는 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와이파이가 안 터집니다. 다시 골방은 창고가 됩니다. 창고로 쓰기 좋은 방입니다.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방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카톡도 봐야 하고 스판도 봐야 하니까요.

책상에 잔뜩 올려져 있는 글쓰기 책들과 벽에 잔뜩 붙여놓은 글쓰기 명언들이 보입니다. 글은 엉덩이에서 나온다. 글이 안 써질 땐 써질 때까지 앉아 있으면 된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많이 쓰면 된다. 제가 손꾸락 피나도록 반복하는 말들이 내 정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포스트잇 색깔도 예쁜 분홍색입니다. 저 포스트잇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지 어느날 보니 앞에 보였고 그래서 글쓰기 명언을 발견할 때마다 적어서 붙인 기억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기억력이 기분나쁠 정도로 나쁩니다. 이런 저를 잘 모르는 분은 저를 미워합니다. 일부러 기억 못하는 척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저는 정말 머리가 나쁩니다. 중1때 52명인가 53명인가 중에 51등인가 52등인가 했을 정도로 머리가 나쁜, 아니 기억력이 형편없는 멍청이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중2를 지나면서 기억력이 이상하게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기억력이 개판입니다. 기억력이 예전보다 나빠 약을 두 개 뺐습니다. 그랬더니 또 몸이 덜덜 떨려서 새로운 약을 하나 추가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젠 너무 졸립니다. 너무 졸려서 자꾸 지하철 역을 지나칩니다. 그래서 자리가 있어도 서서 갑니다.

이런 치매성 기억력으로 다계정 어뷰징이 가능할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계정 헷갈려서 금방 들통날 겁니다.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거고 어뷰징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겁니다. 제가 그닥 좋은 머리가 아니라서 어뷰징 안걸릴 자신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제 노트북으로 가입시켰더니 동일 아이피로 여러계정 사용했다고 정지먹었습니다. 이런 돌머리로 무슨 어뷰징. 어린이집 엄마들도 제 노트북으로 가입시켰고 제 친구들도 제 노트북으로 가입시켰습니다. 제 계정과 친구계정이 같은 통신을 탔고, 제 계정과 어린이집 엄마가 한 통신을 탔으며, 제 계정과 동네 사람이 한 통신을 탔습니다. 전부다 정지먹었습니다. 저도 정지, 제 친구도 정지, 어린이집 엄마들도 정지, 동네 사람도 정지. 다같이 정지먹어서 동지가 많습니다. 제가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늘 노트북을 들고 다녀서 생긴 일이니 제 책임입니다. 너도 나도 정지. 우린 모두 아이피가 같아서 정지먹었습니다. 제가 돌머리라서 생긴 일이니 제가 생각해도 제가 참으로 한심합니다. 요즘 휴대폰 없는 사람이 없는데 각자 자기 휴대폰으로 가입시켰으면 됐을 일을, 설명 편하게 하려고 제 노트북으로 다 가입시켜서 다같이 즐겁게 정지먹었습니다. 우린 블랙리스트 동지입니다. 제가 멍청해서 생긴 일이니 모두 제탓입니다. 이런 머리로 어뷰징이 가능할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제는 철야를 했습니다. 밤 꼬박 새서 도면을 아침에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안 졸립니다. 낮잠도 안 잤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낮에 한참 카톡한 후에 몸이 벌벌 떨려서 약을 먹고 가죽을 뚫을 기세인 심장을 안정시켰습니다. 진정이 잘 안 되어 한 봉지 더 먹었습니다. 가뜩이나 약 먹으면 졸린데 두 봉지 먹었더니 더 졸려왔습니다. 아침에 이메일 보내놓은 거 질문 답변해주면서 멍청하게 모니터만 쳐다봤습니다. 빨리 18시가 되어 퇴근이나 해야지 생각하면서요. 화장실도 다녀오고 커피도 마시고 조금 지나니 벌벌 떨리던 손이 멈췄습니다. 그때야 좀 살 것 같더군요. 졸려서 계속 서있었습니다. 모니터 귀퉁이의 시간을 보며 넥콜 자동 돌아가는 걸 구경했습니다. 제 행성들 베이스가 업글되고 있었습니다. 왜 탐사선이 출발을 안 하나 뭐가 잘못된 걸까,,, 하다가 스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서야 베이스를 업글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어를 모르니 평생 고생입니다. 어쩐지 얼마전부터 왜 탐사선들이 출발을 안하는지 이상하다 했습니다.

베이스가 업글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베이스 2레벨당 탐사선 하나를 출발시킬 수 있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치매성 건망증으로 인해 카톡하다가 손이 벌벌 떨렸던 걸 잊어버렸습니다. 이럴땐 짧은 기억력이 도움이 됩니다. 지난밤에 철야도 했겠다 어서 18시가 되면 칼퇴해야지... 하면서 사탕을 먹었습니다. 자꾸 단 게 땡겨서 세 봉지나 사둔 사탕이 바닥을 보입니다.

'오빠, 증상 보니까 공황장애 초기증상이야. 내가 겪어봐서 알잖아.'

재밌는 동생인데 못 본지 좀 됐습니다. 갑자기 보고싶어집니다. 동생이 괜찮은 병원도 소개시켜줬는데 안 갔습니다. 집 앞이라서 토요일에 가야 하는 병원이라서 안 갔습니다. 토요일은 바쁘니까요. 토요일 오전엔 큰애 치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둘째를 봐야 합니다. 큰애 치료 끝나고 오면 점심을 먹고 애들이랑 놀아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엔 제가 투잡 하느라고 못 놀아줬습니다. 도면 몇 개 보내놓고 나니 오늘은 쉬고 싶어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저는 키보드 두드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글쓰기입니다. 내 열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키보드만 두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우스로 일을 합니다. 3D 캐드는 키보드가 아니라 마우스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손목이 아픕니다. 특히 약먹을 시간이 되면 손목이 더 아픕니다. 손목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약먹을 시간을 알려줘서. 그런데 오늘은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손이 벌벌 떨리고.

저는 내일도 일합니다. 투잡 쓰리잡 중이기 때문입니다. 제 머리는 쉴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설계를 하고 또 설계하고 또 설계합니다. 조금전에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아침에 보냈던 도면의 수정사항입니다. 정확히 20페이지입니다. 내일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검단쪽으로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특수학교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까요. 특수학교가 혐오시설이라서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출근하려면 2시간이 걸리게 생겼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자정이 지났습니다. 모두들 굳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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