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교단일기] 학교 아이들이랑 "그날, 바다"를 보러 갑니다...

우리 학교에서 한 달에 두 번 꼴로 있는 토요 체험 학습. 바로 내일입니다. 알림판을 보니 아이들과 "그날, 바다"를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고... 이번엔 제 담당이 아니지만 저도 따라 가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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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제 삶의 방향을 바꿔놓은 두 번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88년 여름, 같은 반 친구의 자살 그리고 대학교 2학년이던 91년 봄, 김귀정 열사의 죽음.

언젠가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88년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저는 저 자신이 더 소름끼쳤습니다. 세상에, 같은 반 친구로서 한 학기를 함께 했는데도 죽은 그에 대해 저는 아는 것이 전혀, 정말 글자 그대로 전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 깨달음과 함께... 그때까지 재수없는 범생이였던 저 또한 죽었습니다.

또, 언젠가 깊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91년 억수같이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5월의 새벽, 전 날 낮 충무로에서 김귀정이 죽었다는 소식에 저는 또 한번 몸서리쳤습니다. 아... 압사라니...

그래 내 발 밑에도 누군가 있었어. 기껏해야 몇 미터, 몇십 미터의 거리였을 뿐...

무자비한 폭력에 겁에 질린, 나의 눈먼 생존 욕구가 타자의 죽음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는 의식은 "내 발 밑에 누군가 있을 때 느껴지는", 발끝 다리 그리고 척수를 타고 전해지는 그 기괴한 촉감과 만나고, 공명하고, 증폭되어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김귀정이 죽은 그 날, 끝물 운동권으로서의 제 허위의식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어느 4월, 이제 40대가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저는 또 한 번 너무나 길고, 무정하고, 참혹하고, 거대한 죽음의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마주했습니다. 세월호. 생때같은 수백 아이들의 죽음.

그 다음 날, 저는 세월호 이야기가 담긴 기사를 함께 읽으며 우리 아이들과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이 일,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거야.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사람들은 그럴 거야. 지겹다고,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선생님은 경험해 봐서 알아. 지금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 있지만, 큰 슬픔에 빠져 있지만 생각보다 일찍,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어서 잊어버리자고 할 거야. 그런데 얘들아. 앞으로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선생님 말 기억해 줘. 우리 쉽게 잊어버리면 안돼.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밝혀질 때까지. 그래서 아이들이 그만 잊어도 된다고 말할 때까지. 오래 오래 기억해야 해. 그래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구."

그리고 또 4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낮, 저는 아이들과 "그날, 바다"에 관한, 세월호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읽으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왜 그랬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하잖아. 그럴려면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지. 얘들아, 어른들 중에는 말야. 이런 참혹한 일을 두고도 니가 옳으네 내가 옳으네 목소리 높이는 철딱서니없는 분들도 있어. 그런 분들이 목소리도 크지. 그런데 말야. 중요한 건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정답이냐가 아니지 않을까? 그냥,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두려움 없이 질문할 수 있다는 거, 아니 두렵더라도 끝까지 그 질문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얘들아, 내일 이 영화 보고 나면 이 거 하나는 약속하자. 그 동안 잊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거,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거 서로 확인하고, 4년 동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세월호 아이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거 서로 확인하고 앞으로도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절대, 절대 잊기 않기로 우리 서로 약속하자. 우리 함께 이곳에서 계속 살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 모두 이곳에서 서로를 믿고 살 수 있으니까..."


... 내일 저는 세월호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러 갑니다. "가만히 있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같은 약속을 하러 갑니다.

"그날 바다"가 "정답"은 아닐 겁니다. 그저 질문의 시작일 뿐. 그리고 기억 또한 이제 시작일 겁니다. 이제 시작이어야 합니다.

88년, 91년이 그랬듯 죽음과의 대면,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은 결국 산 자들을 위한 귀한 깨달음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아이들을 향한 추모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결국,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희망, 축복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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