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놈이, 사랑 한번, 어설픈 사랑 한번 못해본 나 같은 놈이 사랑을 알 리 없었다. 사랑을 모르니 이별도 알 리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은 이별과 함께 사랑을 알게 해주었다.
파이란 白蘭, 2001
강재씨...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됐습니다.
혼자라는 게 너무나 힘들게 됐습니다.
매일 밤 당신의 사진을 보면서 웁니다.
슬픔이 힘든 게 아니라, 고마워서 눈물이 납니다.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주시겠습니까?
만약 오신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당신의 무덤에 같이 묻어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내로 죽는 것, 제 부탁은 이것뿐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강재씨 안녕...
파이란 中
이강재. 무직에 쌩 양아치, 친구 대신 빵에 다녀온 병신. 푼돈 받고 위장 결혼한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이라고 한다. 인간 실격인 나를. 하찮고 한심하고 인간 취급받아본 적 없는 나를.
작은 사진 속에서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이 사진 속의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하게 되어서 힘들고 슬퍼졌다고 했다.
낭만, 나의 이 비루한 인생에 낭만은 없었다. 빌어먹을 놈에게 낭만이 가당키나 했을까. 그런 나란 놈에게 당신은 낭만을 선물했다. 당신의 사랑도, 죽음도, 그로 인한 이별도 나에겐 낭만이 되었다. 사랑의 낭만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나는 배우지 못했다. 사랑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나에겐 없었다. 사랑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의 낭만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사랑도 모르면서 이별의 낭만을 즐긴다. 아니, 즐기는 것은 아니다. 깡소주를 마실 때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 슬픈 일인지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모르지만 심장의 이 고통이 싫지 않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 채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것이 당신이라는 사실이 좋다. 그 사실이 나에겐 낭만이다.
파이란, 많은 남자가 나를 부러워한다고 해. 울지 않는 남자도 당신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다고. 아마도 파이란 당신은 남자들의 로망이 된 것 같아. 자신을 애절하게 사랑하다 죽은 여자. 오직 사랑으로 남은 여자. 여리고 아름다운 여인, 파이란. 당신은 나에게 이별과 함께 사랑을 주었어. 나의 신부, 나의 아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무덤 곁에 나를 누이는 것뿐이다. 사랑한다는 말, 당신 곁에 가면 할 수 있을까. 고맙다, 나의 아내로 죽어줘서. 고맙다, 나를 사랑해줘서......
이별이 낭만으로 여겨질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아무리 아픈 이별도 시간을 지나오면 낭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별을 견뎌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파이란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의 죽음 후에 그의 마음을 알았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였고 나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로 인해 죽었다면 그로 인해 고통과 죄책감밖에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 낭만을 떠올리진 결코 못할 것이다, 그만큼 잔인한 사람은 아니기에. 이별이 죽도록 아프지 않으면서 낭만적일 수 있는 조건은 설렘만 간직한 채로 시작되지 못한 사랑이어야 하며 상대가 나를 사랑한 채 죽은 경우이다, 파이란처럼.
이별에 있어 낭만은 상실의 크기와 반비례한다. 상실이 적을수록 낭만은 커지나 상실의 크기가 클수록 낭만보다 고통이 커진다. 함께 한 시간이 오랠수록 아픔이 크고 함께 만든 재산이 많을수록 낭만보다는 분쟁의 여지가 크다. 무엇도 공유하지 않은 파이란과 같은 존재와의 이별은 상실은 제로, 낭만은 백퍼다. 죽음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잔인한가? 그러나 나의 파이란을 생각하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만큼 가슴 아프다. 아프지만 나의 이별 중에 가장 낭만적인 이별이다.
written by @madamf MadamFla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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