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다시 만난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해 5월 5일 이었다.
난 당시 대학시험에 모두 떨어지고 재수를 하며 아르바이트로 아는 분과 보문산에서 호박엿을 팔고 있었다. 커다란 갱엿 덩어리를 대패로 밀면 대패밥처럼 삭악사악 나오는 엿을 나무젓가락에 척척 감아 올려서 파는 일이었다. 진짜 호박엿은 아니지만 생강향이 살짝 올라오는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녹아 입안에서 달달하게 녹아드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날은 마침 어린이날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오거나 친구나 연인끼리 산을 찾은 사람들로 정신없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목이었다. 그 사이에서 내 눈과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 둘이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 두 녀석이었다.
"어, 여기 왠일이야?"
친구들은 이미 나를 보고 있었나보다.
"여기서 뭐해?"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손을 잡고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녀석들은 그날 우리집에 나를 만나러 갔었고 집에 없어서 못 만나고 둘이 산에 놀러 왔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라며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다면서 마치 우리가 꼭 만나야할 사람처럼 말도 안되는 운명론까지 갔다 붙이며 좋아했다.
그날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는 삐삐도 핸드폰도 없었으니 집에 없다면 연락해서 만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 5명을 더 연락해서 총8명이 졸업후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1차로 소주방에서 얼큰하게 취한 우리는 그자리에서 계모임을 만들었고 매주 토요일 6시에 만나기로했다.
'호박엿회'라는 다소 웃기지만 내가 호박엿을 팔다가 만났고 그만큼 끈적끈적하게 평생만나자는 의미를 부여해서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만나서 돈내고 먹고 놀자는 일명 먹자계였지만 거창하게 규칙 몇가지를 만들었다.
- 새벽에 자다가도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와서 만나기
- 여자친구 생기면 제일 먼저 우리 모임에 소개하기
- 평생 만나기
등 이었던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때는 친구가 최고 좋았고 혈기 넘치는 시절이었으니 다들 좋다고 동의 했었다. 순진하게도 그이후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는 녀석들이 생기는 곤란한 상황이 생길거라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결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결혼후 새벽에 친구가 부른다고 자다가 나간다면 얼마나 간이 큰 남자여야하는지 그때는 몰랐으니까 가능했으리라.
암튼 그렇게 2차로 호프집까지 순식간에 시간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더욱 그랬다.
"야, 그냥 갈거야? 한잔 더하자."
이렇게 시작해서 우리는 주머니의 돈을 모두 털었다. 다들 집에 가려고 남겨 두었던 차비정도의 돈이었다. 십시일반 2000원, 3000원씩 모아서 포장마차로 갔다. 집에는 걸어가기로 하고 말이다. 빨리 걸어도 3시간이상은 걸릴만한 거리였는데도 헤어지는게 걷는 것보다 싫었으니까.
이때부터 였다. 우리가 매주 토요일마다 돈을 모두 털어서 술 마시고 놀고 집까지 3시간에서 4시간을 걸어서 집에 갔던게.
난 아직도 그길, 그시간을 잊을 수 없다.
그길에서 우리는 가다가 힘들면 셧터가 내려진 가게 앞에 앉아서 얘기하고 또 걷다 얘기하고 웃고 울었었다. 때론 장난치면서 뛰어가기도하고 운이 좋아서 몇백원 남은 날은 자판기에서 캔음료라도 나눠 마실 수 있었다. 술마시고 놀때는 다들 즐거웠지만 집에 가는 그길에서는 속얘기를 다들 하나씩 털어 놓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어떤날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친구에게 세상에 여자는 많다고 위로도 해주고 위로 받았으며 차인 친구는 같이 욕도 해주었다. 잘 사는줄만 알았던 친구의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5층짜리 빌딩까지 날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한다고해서 같이 울었던 일도 그 길에서 였다. 그때 만큼 많이 웃고 울었던 때가 있었을까 싶다.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그때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주 토요일에 얼마 되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돈을 다 털어서 술마시고는 집까지 걸으면서 더욱 친해지고 단단해졌다. 군대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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