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친구로부터 여행을 제안받았을 때 나는 두렵기만 했다. 어떤 이유로든 그 먼 곳으로 가볼 수 있다는 생각을 그 이전엔 단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질 않았으니 갑작스런 제안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낯선 언어들. 그리고 그곳들에 이르기 전에 미리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니 정확히는 그냥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전에 내가 가 본 가장 먼 곳은 중국의 동쪽 운남雲南 - 이름 한 번 갑이다! - 이었다. 하지만 그 조차 아무런 경험도 준비도 않은채 중국말을 유창하게 쓰는 친구를 졸졸 따라다니는 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길거리에서 빵 한조각도 내가 직접 사 본적이 없던, 사실을 말하자면 여행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때였다. 한 달을 넘게 다녔지만 나는 심지어 사진도 찍을 줄 몰랐다. 디지털 카메라가 이미 유행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라 똑딱이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던 것 같은데 그 긴 여행동안 찍은 사진은 100장 남짓이었다. 그나마 무슨 꽃사진 하나를 이리찍고 저리찍고 아웃포커싱과 흑백모드를 신기해하며 찍어댔던지, 대여섯장의 같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중국꽃인지 한국꽃인지 구별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음식사진 하나가 없다. 그 땐 나도 나름의 최선이었겠지만, 지금 떠나면 느끼지 못했을, 좀 더 신선했던 당시의 내 시간을 기록해 놓지 못했던것이, 지나치게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러면 20대 중반 한참 센치하던 내 예민한 감성들은 대체 무얼 했던가 생각해보니 주로 편지를 썼던 것 같다. 당시 한참 손편지에 맛을 들여 여기저기 손편지를 쓰곤 했다. 당시 그건 내겐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주로 이렇게 엄청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투로 시작하고 끝나던…

… 저는 지금 옛 장안이던 시안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 이 편지를 받으실 때 쯤이면 저는 또 다른 도시에 도착해 있겠지요…
… 당신을 그리워 하는 당신의 친구 수수로부터.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던 여행이 한 달이 넘는 제법 긴 여정이다 보니 돌아온지 일주일도 되질 않아서 나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몸의 병이 아니었다. 마음의 병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국도변에 나무만 스쳐지나가도 마치 중국 대륙의 어떤 도로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강만 보아도 서호西湖나 이화원頤和園의 잿빛 호수일 것만 같았다. 길거리에서 중국말만 들려도 반가움이 앞섰다. 가을의 건조함이 나뭇잎을 말리고 갈색잎으로 물들일 계절 남자의 마음이 가장 센치해질 때 마치 나는 상사병이라도 걸린 심정이었다. 함께 간 친구에게 그 심정을 털어놓았더니 친구가 내게 한 첫말이
“병에 걸렸구만. 또 떠나야 나아.”
그래서 나는 그 먹먹했던 감정의 실체가 병인줄 알게 되었다. 나는 약 1년 가까이 그 지독한 병을 앓았다. 어릴 때 그리워했던 엄마의 모습과 내가 따라다니며 짝사랑했지만 실패했던 몇몇 이성들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을 제외한다면, 아마 내 인생에서 그렇게 심하게 앓았던 적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2년 쯤 지나 나는 생각치도 못하게 먼 유럽 여행을 또다른 친구로부터 제안받았다. 그리고 그 때 들었던 막연한 두려움이 내 머릿속, 가슴속, 내 라이프 스타일을 싸그리 바꿔놓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 그렇게 두려워했던가 싶을만큼 내 여행에 몰두했고, 지난 8년간의 대부분의 내 관심사는 오직 유럽이었다. 너무 많은 경비와 시간을 써야하는데 상당히 망설였지만, 이내 내 태도는 바뀌었다.
번 돈
근무 만 4년 = 1460일 근무
평균 월급 170만원 = 약 8,160만원
쓴 돈
연간 1회 (평균 여행기간 6주) x 8회 = 336일
회당 비용 약 1천만원 = 약 8천만원
사실 돈 이야기는 그 주제나 소재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이어서 다른 곳에서는 좀 하기 어려운데, 스팀잇에선 이런 소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니 좀 편안하게 풀어놓습니다. 그냥 솔직한 소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니 불편하시면 패스해 주셔도 됩니다. 괜히 쓰면서도 걱정되어서 첨언을… ㅜㅜ (착한사람 콤플렉스 환자)
그 지독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4년간 연구원을 다니며 모았던 모든 돈을 다 날렸다. 심지어 한 번에 낼 수 있는 여행기간이 부족하여 일을 때려치웠다
이건 명분이고… 진작에 때려 치울라고 했다. 한국사회는 비싼 인력을 사다가 보고서나 문서정리를 시키는 경우가 많다! 다 알겠지만. 월급은 그만큼 나오니 문제는 없지만, 이왕 일이면 내 경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애고…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8년 동안 매년 쓴 돈을 계산 해 보면 누적 약 8-9천만원 정도를 쓴 것 같다. 연구원에서 받은 월급이 4년간 약 8천, 고스란히 여행비로 날린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여행중일 땐 편하게 썼지만 여행중이지 않을 땐 심각한 생활고(?)에 허덕였다. 독거인의 현관에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여러종류의 세금들과 공과금과 통신비, 무엇보다 카드빛 독촉장이 쌓여갔다. 학생의 신분이었고, 일을 찾아야 하는 시점, 그리고 흔히들 걱정하는 30대의 나이. 격려보단 졸라매지 않고 조금 편하게 다니는 여행에 대한 조소와 사치한다는 지적, 점잖은 조언, 대책 없는 카드빛 생활비, 그리고 밀리는 공부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훨씬 많이 받았다. 사람들은 마치 내가 해본것에 대해 모두 다 알고있다는 투로 구체적이고 빈도수 높은 가르침을 주곤 했다.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들의 잔소리를 등지곤 했다.
“당신들이 선생님을 했다면 스타강사가 되지 않았을까”
‘열정페이’란 말이 최근 몇 년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부작용이 심했던 단어라면 '경험소비'란 말은 가장 매력적인 단어였다. 사실은 그들의 잔소리 때문인지 어쩐지 펑펑 돈을 쓰고 졸라매고를 반복하다보니 맨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막사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 - 그 땐 '자아검열'이란 표현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흔들리는 맨탈을 붙잡아 준 단어가 '경험소비'란 말이었다. 어쩌면 돈을 주고 시간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소비해서 돈을 벌었다면 이젠 돈을 소비해서 시간을 살 차례였다. 시간과 돈이란 마치 값싸게 산 물건을 비싸게 파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가진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을 소비해서 더 비싼 시간을 사는 것이다. 나는 4년이란 조금 싼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더 비싼 1년의 시간을 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떤 물건보다 좋은 물건을 구매한 것 같다. 그 때 그 물건을 사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그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사고 파는데 생각보단 많은 미련이 남고, 최악의 경우 ‘후회스럽기도’ 했던 거래 역시도 수없이 많다. 그 중에 이렇게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가장 큰 행운이다.
처음에 나는 이 긴 경험을 “유럽의 작은 마을들”이란 이름으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8년에 걸친 짧고도 긴 유럽여행이었지만 나는 5개국 밖에 가질 못했다. 프랑스란 나라에 꽂힌 탓이었다. 월드컵 경기에서 말고는 생각조차 없었던 프랑스는 나를 미친듯이 빨아들였고, 그 결과 내 여행은 엉뚱하게도 프랑스 50개도시 방문이란 목표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사는 건 늘 변화를 겪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약 25개 도시. 절반의 목표만 달성한채 내 여행은 중도하차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리고 목표의 차질은 내 기록도 멈추게 했다. 생각날 때 마다 이것 저것 도시에 대한 정리를 해 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노트파편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기억나지 않는 것이 기억나는 것보다 많아지자 그 관심도 멀어졌다.
최근 나는 제법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오랫동안 미루고 끌어왔던 일을 마무리 짓고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갑자기 자꾸 미뤄둔 다른 일들이 생각나고, 그걸 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 이게 도피심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관심이 멀어졌던 여행기록을 다시 들춰내고 싶어서 견디질 못하고 있다. 기록해 둔 자료들은 흩어져서 찾지도 못하겠고 기억을 더듬어 몇 꼭지를 써 봤으나, 신통치는 않은데도 말이다. 태생적으로 감성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는 것은 - 듣는이가 알아들을 만큼 정연한지는 모르겠으나 - 익숙한데 정보를 찾아내고 정리하는 것엔 또 약해서 늘 헤매는 스타일이라...
잘 찍지도 못한 사진들을 꺼내서 기억을 더듬고 이리저리 모아붙여서 주제별로 한 번 정리해볼까 마음을 먹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