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중고서점 시리즈] 외로움을 모르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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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서점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책들이 있다. 서가에 여러 권씩 세를 형성하고 있는 책들이다. 한때 화제를 모았던 베스트셀러들은 세상에 나온 물량 자체가 많아서, 새 책일 때도 일반 서점에서 매대나 새 책 코너 하나를 차고 앉아 세를 과시하더니, 중고 책이 되어서도 여전히 이렇게 세를 과시한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그때는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고, 지금은 내놓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책 세계의 금수저인 이 책들은 책으로 만들어진 순간부터 외롭게 있어본 적이 거의 없다. 중고 책이 되어서도 외로움을 모르는 철부지 같은 그 책들을 보면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화려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부럽기도 하지만, 이곳에선 인기가 별로 없으니 측은함도 느낀다. 그 책들이 자존심 높은 옛 선비의 정신을 지녔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으니 더는 여한이 없소. 나를 중고서점으로 보내기보다 차라리 찢어발기시오!”
 그러나 이 책들은 이런 정신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그 책들은, 도서관이나 중고 서점이나 놀러간 친구 집 서재에서나, 어디서든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에 희소성의 측면에서 가치가 높지 않다. 도서관에 확실히 있고, 또 여러 권 있을 법한 책이니 읽고 싶다면 언제든 빌려 읽으면 된다. 그래서 중고서점에서 그 책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늘 만나는 배경 취급 받기 일쑤다.

 중고서점에서 내가 주로 뽑아드는 책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에 아까운 책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가에 홀로 꽂혀 있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처럼 초연해 보인다. 호기심이 갔던 책이라도, 두 권 세 권 꽂혀 있으면 선뜻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저 책들은 언제 와도 남아 있을 터이니, 지금 사야 할 책은 지금이 아니면 못 만날 책들이다.

*

 화려하게 출발해서 철없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보다, 조금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뒤늦게라도 누군가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훨씬 보기 좋다. 책이든, 사람이든. 가끔 구하기 어려운 책이 있다. 입소문을 타고 좋은 책이라는 평가도 받고, 시장에도 꽤 풀린 것 같은데 중고 서점에 나오지 않는 책들 말이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하다.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들은 잘 내놓지 않는다. 읽히고 나서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가끔 내 삶은 어떤 책의 운명과 비슷한지를 생각해본다.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하거나 많은 걸 갖고 나지 못했으니, 뒤늦게 누군가에게 읽히거나, 끝까지 읽히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터. 등장도 초라했지만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하고 냄비 받침으로 끝나는 책은 되고 싶지 않다. 외로움과 삶의 질곡을 천천히 체득하여 단단한 내면을 지니고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아 누군가의 서재에 귀하게 꽂힌 책이 되고 싶다. 화려하거나 세를 형성하진 못해도 흔하지 않은 책, 어떤 이에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책이 되고 싶다.


/중고서점 시리즈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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