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작은생각] 서 기자님, '기하'가 '모양'이라고요? - 서화숙 기자와의 가상대화

잠시 전, 존경하는 철학자 아름다운님( @armdown )께서 올려주신 글 "낭만에 대하여(feat. 손석희) : '앵커브리핑' 정말 문제 많다(fake fact)"를 읽으니 문득 3년 전의 어느 토론회 장면이 생각나네요. 당시 서화숙 기자와 나누었던 가상의 대화를 기록 속에서 소환해 봅니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1일 2포스팅의 무리수를 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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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괄호 안에 있는 x의 숫자가 달라지는 것에 따라서 f 값이 달라지는 것을 f(x)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더군요. 제가 그것을 그제서야 발견하고 정말 전율을 느꼈습니다.

헤르메스: 저는 이 대목을 보고 다른 의미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함수函數'라는 말에 '수'가 들어가니까 이런 착각을 일으킨 듯한데요. 함수는 특정한 수가 아니라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영어 function을 한자로 소리나는대로 옮겨쓰다 보니 상자를 나타내는 '函'자에(초등학교 때 상자를 그려서 함수 개념을 설명하는 걸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됩니다) 수학과 관련된 개념이니 그냥 발음도 비슷한 '數'를 붙인 것일 뿐 특정한 ‘수=값’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서화숙: 제가 고등학교를 75년에 들어갔는데, 그 때 기하의 뜻은 geometry 즉, 한자어로 ‘기하(幾何)’라고 붙여서 우리나라에서도 ‘기하’라고 부르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수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양과 셈’에 관한 학문이다”라는 말을 듣고, “아, 기하가 ‘모양’이구나. 내가 그것을 진작 알았으면 수학을 쉽고 재밌게 공부했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헤르메스: geometry는 가이아(ge, 땅)을 측량하는(metr) 것(-y)이란 뜻으로 범람이 잦았던 나일강 유역에서 발달한 '토지측량술'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걸 영어식으로 읽으면 대충 ‘지아메트리’가 되고 이걸 줄여서 ‘지아’, 그리고 그걸 한자로 소리나는 대로 옮겨 써서 ‘기하’가 된 거죠. 한자 사전을 찾아보면 아시겠지만 ‘기하幾何’와 ‘모양’은 의미상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서화숙: 여러분은 ‘소인수분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드세요? ‘소인수를 분해’하는 겁니다. 한국말로 ‘자동차 분해’라고 한다면, 자동차를 분해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소인수 분해’라고 쓴다면 ‘소인수를 분해’한다는 말을 의미해야 합니다.

헤르메스: 이건 단견인 거 같네요. 특정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소인수)과 특정한 동작이나 작용을 가리키는 명사(분해)가 서로 인접해 있다고 해서 둘 사이의 관계가 반드시 ‘목적어-술어’이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렇게 따지면 ‘전기 분해’라고 쓰면 ‘전기를 분해’한다는 말을 ‘의미해야’ 하나요? -,.- ‘목적어-술어’ 관계인 경우로 한정시키더라도 좀더 세밀히 들어가 보면, 목적어는 작용 이전의 대상일 수도(ex. 벽돌 건축)일 수도 있고, 그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ex. 성당 건축).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화자의 의도와 맥락입니다. 이는 영어든 한국어든 마찬가지죠.

'벽돌로 성당을 짓는 일'을 '벽돌 건축'이라 부를 수도 있고 '성당 건축'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처럼 '자연수를 소인수로 분해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자연수 분해'라고 쓸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서화숙: 영어로 ‘무리수’는 irrational number입니다. 즉,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숫자라는 말입니다. 유리수는 rational number 즉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헤르메스: 이 대목 또한 실소를 불러일으킵니다. rational은 ‘합리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비율이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비/비율이라는 뜻의 ratio에서 파생된 말인 거죠. irrational은 부정을 표시하는 접두사 ‘in-’이 자음동화를 일으킨 ‘ir-’이 맨 앞에 붙은 것으로, ‘비율이 없는’이라는 뜻이구요. 정의상, 유리수는 ‘유비수’로 무리수는 ‘무비수’로 옮기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만, 서기자의 생각과 달리 수학적 맥락에서는 rational/irrational과 ‘합리적 이해 가능성 여부’는 직접적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서구적 합리성이 수학적 비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정도의 언어적 해석은 가능하나 전혀 동떨어진 맥락의 이야기죠.

서화숙: ‘기수’와 ‘서수’도 그렇지요. ‘순서’와 ‘양’을 뜻하는 말로 용어를 바꾸면 될 것을, 어려운 한자말을 고집합니다.

헤르메스: 기수를 한자로 ‘記數’라고 생각해서 ‘양’을 기록/기술하는 수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기수는 한자로는 基數, 영어로 cardinal number로 ‘축이 되는 수’라는 뜻입니다. cardinal의 어원이 되는 cardos가 ‘경첩’이라는 뜻이거든요. 참고로 cardinal을 성직에서는 ‘추기경’이라 번역하는데, 모든 성직의 중‘추’가 되고 ‘기’반이 되는 벼슬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했겠죠? 서수는 ordinal number이니 ‘순서를 나타내는 수’ 맞습니다. 바탕수, 순서수 정도로 바꿀 순 있겠으나 기수, 서수와 비교해서 난이도 차이(?)가 얼마나 있을지는 ‘미지수’네요.^^

서화숙: ‘연산’이 무엇입니까? calculation 즉, 계산입니다. 계산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수학 교과서로만 들어가면 ‘연산’이 됩니다. ‘연산’이라는 말 우리 일상에서 씁니까?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고쳐야 됩니다.

헤르메스: 이 대목에서 서기자께서 사뭇 흥분하신 거 같은데, 연산은 calculation이 아니라 operation입니다. calculation은 ‘셈하는 것computing’에 가깝고 operation은 일정한 절차를 ‘실행하는 것performing’에 가깝습니다. operation의 번역어로 ‘연산’이라는 표현을 취한 것을 저는 적절하다고 봅니다. 연기, 상연, 연주, 공연 등의 예에서도 보듯 한자 演에는 실행의 의미가 있거든요. 어쨌든 아무리 비분강개하셨더라도 calculation과 operation의 차이를 뭉개 버려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일상어와 전문용어 사이의 갭을 줄이자는 주장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나 그 방법은 좀더 신중하고 세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통념-일상적 상념과 학문-체계적 사고 사이에는 엄연한 갭이 있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시구요. 저는 다음에 또 뵐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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