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한 가지를 위해 99가지를 포기한 남자, 그래서 후회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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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유튜브의 자동재생 리스트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왔다. 이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와 '사랑했지만', '거리에서'가 차례로 재생됐다. 그의 음색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영상을 들여다보게 만들기 충분했다. 음악이라는 요소는 지난 시대의 향수와 낭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10년 전쯤이었나, 어릴 때 살던 동네는 새벽 1시쯤이면 도로에 차들이 하나도 없어지는 시골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버릇처럼 산책을 나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어폰을 꽂은 채 라디오헤드의 'Creep'을 크게 틀고 도로의 중앙선을 따라 걸으면서 눈을 맞았던 겨울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한량처럼 자유로운 삶? 배낭하나 둘러메고 떠나는 여행자? 평일에 예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모습?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도전하는 사람? 적고 보니 낭만이라기보단 이상 속의 내 모습이 아닌가 싶다. 낭만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사전 그대로의 의미라면 모두가 생각하는 낭만은 서로 다를테고 (어느 정도는 공통점이 있겠지만) 내가 떠올린 의미도 틀린 답은 아닐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낭만그래퍼'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다. 그리고 블로그의 첫 글에 밝혔듯 '그래퍼'의 의미는 쓰는 사람, 그리는 사람, 기록자라는 의미. 합치면 낭만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사실 이 닉네임의 의미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향이기도 하다. 아직은 현실에 발이 묶여있고 그 족쇄를 벗어 던질 용기랄까,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어서 아직 경계선에 서있달까. 마냥 하늘 위로 떠오르거나 땅에 발을 딛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 어떤 형태로든 이 모습을 벗어나긴 해야 하는데 말이지.

다시 낭만이라는 단어로 돌아가보자. 연관되는 단어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청춘'이다. 젊은 세대와 낭만은 무엇을 하더라도 잘 어울린다는 포장 효과가 있다. 자칫 객기와 궁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들이 젊기에 허용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국토대장정이라거나 무전여행, 봉사활동 등을 포함해서. 어른들(어른이라는 경계가 굉장히 모호하긴 하지만)은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젊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며 응원해주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청춘에 가까운 낭만은 연애에 관련된 것들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가장 낭만적일 때는 사랑에 빠진 때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가? 라는 치기어린 행동들? 밤새 몇 시간씩 뜨거워진 핸드폰을 붙잡고 통화를 하다가 잠들기도 하고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가기도 하는 등등. 하지만 이제 굳이 연애에서 낭만을 찾기에는 힘든 것 같다. 그 이유는 지금 내 나이대의 사람들이 낭만 이외에 챙길 것들이 더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혼, 육아, 취업에 이어 연애까지 포기하려는 N포 세대의 고충을 나름 이해하고 있기도 하고. 먹고 살기에도 힘든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기엔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느낄 때가 바로 친구들과 만날 때다.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결혼이라는 사회의 계단을 밟아 올라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다른 선택을 한 나와의 괴리감이 느껴진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기에 나는 자유를 쟁취했지만 그 자유는 다른 부분에서 (특히 금전적인 부분에서) 결핍된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가끔 날더러 부럽다고 하지만 어떨 때는 나 또한 친구들이 부러웠다. 최근에 나랑 비슷한 선택을 한 형이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한 가지를 위해서 99가지를 포기한 것이고, 그들은 99가지를 위해 한 가지를 포기한 걸지도 몰라."

이 선택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 파란 약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빨간 약을 먹는다면 진짜 세상으로 나와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하고, 파란 약을 먹는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을 먹고 현실과 마주한다. (그래야 영화가 진행되어서이겠지만)

나는 낭만이라는 빨간 약을 찾아 안정이라는 파란 약을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 99가지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운 것은 기회비용의 문제인 걸까. 아니면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옛 조상님들의 말이 맞아떨어진 걸까.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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