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이름과 낯짝을 처음 본 것은 국정감사장에서였다. 국민을 대표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또 그가 코너링을 잘 타는 자식의 아비 라인을 탄 작자라는 것을 알고 나니 그 나물에 그 밥이구나 했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이름이 뉴스를 오르내렸다. 나는 이미 그에게 다른 의미로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무르익어 언젠가는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간사하여 까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죄를 쪼아 먹여 없애주기를 바랐었다,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먹히다 남은 그의 죄는 떨어지기 전에 드러났다. 감이 떨어지고 봄이 오기를 기다렸을 그들 인생의 계절에 혹독한 겨울만이 남기를 바란다.
이창동, 전도연, 송강호.
세 명의 이름으로 나는 그 어떤 영화의 정보도 접하지 않은 채 재생 버튼을 눌렀었다. 그들의 이름이 주는 기대감과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 다른 이름의 감을 주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것은 실망감이다. 앞서 말한 그들의 나무에는 실망감이 열리지조차 않았으리라 믿고 싶다, 그래야 떨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비밀의 햇볕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아들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향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도시에서는 옆에 누가 살아도, 데면데면하여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밀양 입성은 지역사회에서 크게 눈에 띌 만하다, 그곳은 입에 발이 달린 듯 없던 것도 생겨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책속의 세상

그녀는 불행한 것일까. 오히려 그녀 자신은 불행보다 불안을 은연중에 안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불안이 자신에 의해 좌우된다면 불행은 타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데 그렇게만 보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신애가 차린 피아노 가게 앞, 약국을 운영하는 부부의 눈에는 신애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보이지 않는 책 속의 세상을 설파하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그의 말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기름종이에 물 붇기

그녀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모르겠지만, 지역사회인 밀양에서 살아가려면 그곳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녀는 물과 같고, 밀양은 기름과 같았다. 밀양으로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종찬은 그녀가 사회에 스며들 수 있게 하는 비눗물과 같은 존재였으리라.
전부 너였다

신애는 절반 같던 남편을 잃고 내려온 밀양에서 나머지 절반인 아들을 잃었다. 절반을 잃은 그녀에게 아들은 절반의 나머지의 절반이 아닌 전부였다. 그 전부를 앗아간 건 조금씩 그녀의 마음이 지역사회에 스며들며 만난 이였다.
온통 그였다
전부를 잃은 신애의 허한 마음을 차지한 건 보이지 않는 믿음이었다, 보이지 않는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처음엔 눈에 잡히는 실체가 없는 그것을 붙잡는 것에 망설임을 보였지만, 그 허상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언가 스며들 틈을 전부 잃어버린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전부를 송두리째 잃었기에 전부를 가득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절대적인 그가 가득 찼다.
용서의 두 얼굴

분명 하늘의 그는 한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귀는 수십에 수천을 넘어 수만, 수억을 가지게 되었다. 수억의 머릿속, 가슴속을 한 바퀴 돌아 그들의 입 밖으로 나온 그의 말씀은 이미 그의 말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과연 한 바퀴만 돌았을까. 책 속 하늘의 그의 말은 그것을 믿는 자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김추자>
용서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일까.
불행과 불안
그들은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뒤의 시간을 살아갈 어엿븐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남기었을 것이다. 그들을 성인<聖人>이라 말한다. 불완전했을 그들은 알았을까. 어엿븐 사름들의 말을 들어줄 그들의 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들에 의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고, 타인을 불행하게 보이게 만든다. 전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그러모으고, 간증이란 이름으로 저희들끼리 용서를 구한다.
감이 떨어진다
한 여검사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우수수 감이 떨어지고 있다. 그 여검사는 파렴치한 선배가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죄를 덮어두려는 수작에 용기를 얻었다 했다.
기대감과 무게감을 가졌던 수많은 예술인들이 떨어지고 있다. 손에 닿지 않는 저 높이 달린 감들은 겉으로는 맛있게 익어갔을 것이다.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감은 가까이 있는 까치들조차 건들지 않는다.
사람들조차 알지 못해 아니,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까치밥으로 남겨놨을 그 감들.
겨우내 자연스레 떨어져 다시 봄이 오면 새 열매를 맺어 지난날을 덮으려 했던 그 감들.
감나무 전체가 썩기전에 도려내야 한다. 떨어진 그 감들은 거름조차 될 수 없다. 오히려 전체를 물들게 할 것이다.
두려움과 용기
두려움은 누가 심어주는 것이며, 용기는 누가 쥐여주는 것인가. 하늘에 계신 절대자인가. 이 땅 위의 수많은 절대적 존재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들의 권위에 짓눌려 두려움을 숨기고 살았을 그들이 서로에게 용기를 얻으며 고백하고 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 단지 절대권력을 지닌 그들뿐이었을까. 이제는 두려움 대신 용기를 주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