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글쓰기에 참여하는 글을 시간을 잘못 맞추어 미리 하나 프리퀄로 쓰게 되었습니다. ^^ 제가 모자란 탓이라서 뭐 누구 탓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혹시 프리퀄 글이 궁금하시면 낭만적 여행기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해온 시간들 중 그 어느때 보다도 빠른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수십명이 한꺼번에 볼 수 있는메신저를 사용한다. 지금 이순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상재해를 생중계로 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생일임을 알리는 알람이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뜬다.
이런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함은 물론 이거니와 업무의 효율성도 높인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리해지고 빨라진 이면에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더불어 '기대시간' 즉, 내가 어떤 요청을 했을 때 그것의 응답을 기대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졌다. 예전에는 이메일을 보내면 PC로 열어서 봐야 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메일 답장의 '기대시간'이 하루 정도 였었다. 하지만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보고 답장을 쓸 수 있게 된 요즈음은 '기대시간'이 한, 두시간으로 바뀌었다. 빨라서 좋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피곤하다.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일상과 모든이들과 연결되어 있는 환경에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예전에는 그래도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씩 기다리는 낭만이 있었는데 말야' 같은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아, 빨라진 세상에 낭만을 빼앗겼나?'
갓 대학 신입생이 되었던 봄에 요즘 말로 하면 썸을 타던 동기 여학생이 있었다. 서로 맘이 있는 것은 충분히 눈치를 챌 수 있었음에도 뭔가 결정적인 상황이 없어 진도가 지지부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봄날이었나 학교에 등교를 해서 사물함 문을 열었더니 워드프로세서로 곱게 타이핑한 시와 장미 꽃 한다발이 사물함 문 안쪽에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으로 시작하는 그 시가 '그 서늘한 눈동자'와 함께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음은 물론 이거니와 그것으로 짧은 봄날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카톡의 선물보내기로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하는 것도 낭만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상대방의 사물함 비밀 번호를 알아내어, 꽃다발과 시로 마음을 사물함에 걸어두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준비하는 시간을 내내 설레었을 것이고, 그 많은 학우들이 오가는 사물함에 걸기 위해 또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직접 건네는 것보다 우연히 발견할 기쁨을 위한 마음은 받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요즘 같으면 하루가 지나 받을지 이틀이지나 받을지, 받았는지 아닌지 확인이 안되는 이런 마음 전달을 시도할 이가 얼마나 있을까. 때로는 좀 느려서 더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확신이 없어도 시도할 수 있는 그 마음이야 말로 낭만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시작된 봄날의 짧은 꿈은 여름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참히 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서로에게 충실하게 마음을 전달하고, 그 전달된 마음과 감정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었던 것, 또 그런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이 진정 낭만적인 시간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즉답을 기대할 수 있는 요즘이라면, 문명의 이기에 낭만은 그만 살해당하고 만것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요즘도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남녀를 보면, 그들이 썸을 타고 있는 것인지, 그냥 직장동료인지 구분이 된다. 남녀 사이에 감정이 개입되어 있으면, 희한하게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시선도 표정도 웃음까지도.
그들이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아주 낭만적인 방법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사랑의 기류에서 나는 낭만을 발견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낭만적이되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사람이 감정에 몰입할때 나타나는 그 표정 그 눈빛 만큼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하. 어쩌면 낭만은 아직 죽지 않았나보다. 내가 알고 기억하는 우리시대의 낭만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눈코뜰새 없이 돌아가는 이 엄청난 속도의 세상속에서도 그 속도에 맞는 낭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 보다. 아마 이들이 또 십여년 뒤에 '아 그땐 참 카톡같은거 보내고 그랬었어. 낭만적이었지' 할테니 말이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