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꽉 찬 어른이 될 걸음
소공녀 (Microhabitat, 2017)
한동안 영화를 끊었었다. 쥬라기월드나 어벤져스같은, 카페에 질린 친구들과 시간 때우려 본 영화들을 제외하고는.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취업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줄어드는 생활비에 계속해서 지원했다. 3사 방송국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부조리함에 떨어졌다. 첫 번째 면접자에게는 40분을, 나에게는 10분을 준 면접관. 멘붕에 빠졌을 때, 스티미언분(@seoinseock)께서 추천해주신 「최고의 휴식」이 떠올라 읽었다. 가만히 있어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잡념 때문에 몸은 쉬어도 머리는 쉬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책 뒤편에 실린 최고의 휴식 5day 실천법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명상을 하고, 평소 지인들의 추천이 자자했던 「소공녀」를 봤다. 신기하게도 책과 관련된 부분이 많았다. 돈이 없어 집을 구하지 못해도 위스키와 담배로 현재에 집중하는 인물. 과거와 미래에, 괜한 걱정과 후회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닌 눈앞에 놓인 것들에 집중하는 미소. 나이가 들며 삭막해지는 지인들에게 실망을 할만도 한데, 끝까지 위로를 주는 인물을 보니 온갖 감정이 교차했다. 그래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스티밋을 열었다. 최대한 온전히 이 감정을 글에 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소에 나를 투입했다. 보증금이 없어 저렴한 방을 구하고, 하루하루 썼던 생활비를 수첩에 적으며 당장 내일을 걱정했던 스무 살을. 삭막한 도시와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온정과 사랑을 가진 인물을. 영화가 진행되자, 나는 미소의 주변 인물이 되었다. 취직하지 않는 미소가 이상했고, 보증금을 모으겠다면서도 위스키와 담배를 꼬박꼬박 소비하는 미소가 한심했다. 보일러를 틀 돈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챙기는지. 조그마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사람에게 데이고도 실망하지 않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대변하듯, 작중인물이 얘기했다. "넌 염치가 없어. 우리 집에 머물면서 보증금을 모으겠다는 애가 술과 담배를 해? 그런 것까지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잘못된 것 같지 않니?" 그러자 미소는 답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라 스포일러가 될까 적지는 않겠지만, 미소의 말에 마음이 찌릿찌릿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싫어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있었나보다. 집은 있어도 마음은 풍족하지 않아 남들에게 베풀지 못하는 그런 사람. 취업에 전전긍긍하며 내 힘듦에만 집중하는 그런 사람.
처음 상경하고 노량진에 놀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 육교 위에서 할머니가 나물을 팔고 계셨는데, 힘이 되고자 편의점을 들러 따뜻한 꿀물을 샀다. 점장에게 "저 할머니는 언제부터 저기 계셨어요?"라 물었더니, "저 할머니 돈 많이 버는데. 이 꿀물 줄 거면 나나 줘."라고 말했던 사람에 충격을 받았던 스물. 삼 년 후에는, 겨울에 할머니가 나물을 팔아도, 외국인이 스마트폰을 든 채 길을 헤매고 있어도 누군가 도와주겠지라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던 내가 엔딩크레딧과 함께 떠올랐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집의 크기는 텅 빈 마음의 크기"라고 말했다. 동감하는 말이다. 큰 집과 비례하여 마음의 크기도 텅텅 비어버린 사람들. 나는 현재진행형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았기에 다행이다. 사람들에게 베풀고, 집과 잔고가 아닌 마음의 크기를 키울 것이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말하는 미소처럼 그간 성공의 욕구로 인해 덮어두었던 생각과 취향을 키워야지. 우리 모두 마음이 꽉 찬 어른이 되어 서로를 다독이는 한국이 되기를.
(1750자)
영제목 Microhabitat을 검색해보니,
'미소(微小)서식 환경 (미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 뜬다.낭만의 사전적 정의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라고 합니다. 취업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과 취향을 키우려는 제게 낭만의 정의를 알려준 영화같아 @garden.park님의 공모전, <한여름 밤의 도라지 위스키, 글쓰기 공모전>에 참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