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다시 꺼내보는 영화, 500일의 썸머. 썸머를 변호하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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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니 다시 이 영화를 꺼내들고 싶었다. 이번이 몇 번째일까. 이 영화를 500번은 봤더라 하던 예전 짝사랑 남자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 녀석에게도 썸머는 bitch였을까. 그녀에게 상처를 준 녀석이 나에게는 bitch였다.


작가 노트 : 이 영화는 허구이며, 누군가가 연상된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작가는 영화의 시작부터 썸머를 나쁜년으로 상정했다. 그것도 너무 비겁하게 말이다. 우연이라니 실소가 터져 나온다. 자신이 겪은 실연의 아픔을 복수심이 불타올라 떠나간 그녀의 잘못으로 돌리며 영화로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까.

이미 막이 오른 후 늦게 객석에 앉아 앞의 문구를 놓친 관객들, 특히나 남자들은 톰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썸머는 나쁜년이었다고.

이 영화를 대여섯 번은 본 듯한 나도 톰의 감정에 몰입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썸머는 나쁜년 정도는 아니었고, 토마스는 썸머를 나쁜년이라고 말할 만큼 잘하지도 못했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치열하게 썸머의 입장에서 보련다. 톰을 못난놈이라고 상정하고서 말이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남자 입장 아무리 대변해봐야 같은 남자에게 인정받지, 정작 여자에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톰에게 사랑은 꿈과 같았다. 어젯밤 꾼 꿈처럼 항상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다. 500일의 여름은 뜨겁고도 뜨거워 열병에 걸린 듯했다. 하지만 썸머는 달랐다. 그녀는 너무도 차갑게 떠나갔다. 톰은 썸머에게 윈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썸머에게도 사랑은 꿈과 같았지만 그 꿈은 무의식에 있지 않고 현실에 있었다.
회의실에서 처음 눈인사를 하고 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다시 마주한다. 톰의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The smith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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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ie by your side
Well, the pleasure - the privilege is mine
당신 곁에서 눈 감는 건 최고의 죽음이야.

이 노랫말이 둘에게는 어떻게 다르게 들렸을까. 아마도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째 되는 이 시점부터 톰의 Summer같던 꿈과, 썸머의 계절 같은 사랑이 펼쳐지는 시작이 아닐까 한다. 뜨겁기만 했던 톰과, 따뜻하고, 뜨거웠고, 서늘했고, 차가웠고 또 다시 차가웠던 Summer. 톰은 썸머의 계절을 잡지 못했다.


이 영화를 보려면 날짜를 잘 쫓아야 한다. 모든 날짜는 톰을 중심으로 돌아 간다. 첫장면에서는 500일의 열두날을 앞두고 두 남녀는 웃고 있고, 첫날로 갔다가, 다시 중간으로 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첫 장면에서 톰과 썸머가 웃어보인 미묘한 차이를 느끼려면 500번까지는 아니어도 5번 이상은 봐야 할 것 같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아니 더 봐야 알 것 같다.

톰은 그 500일을 다 기억해내고 있는 것일까, 그 기억들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편집되지는 않았을까. 주고받은 감정의 맥락이 툭툭 끊겨 결국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방송사들은 에릭남을 이용했다. 단지 그가 영어를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잘 잡아내 다른 인터뷰어라면 꺼내놓게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끌어냈으니 말이다. 그를 인터뷰어로서 좋아하던 클레이 모레츠는 이 영화에서 레이첼로 분해 톰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음을 꺼낼 수 있도록 들어주는 것. 어떤 관계에서나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사랑에서는.


이제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레이첼의 충고를 듣고 있는 톰. 소꿉장난하나. 레이첼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톰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이는 톰 주위의 친구들이 아닌 그녀일 것이다.

톰은 그녀의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어 헛갈린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 경계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썸머는 아무렴 어떠냐며 그를 안심시키듯 말하지만, 그녀의 알 수 없는 웃음에 톰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나도 갈피를 못잡겠다. 본 변호인은 썸머씨의 변호를 더 이상...아니다, 집중.

259일째, 둘은 바에 앉아 술을 마시며 문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서부터 일까. 있는 그대로의 너가 좋다던 톰과, 아무렴 어떠냐는 썸머. 자신에게 치근덕대던 남자가 오기전부터 썸머는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썸머 자신의 마음속을 그녀도 모르는 것 같다.

톰이 자신의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그가 그려놓은 자신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확신이 들었겠지. 그에게 찌질이라고 하던 놈에게 그가 한 짓을 보고는 서서히 피어나던 믿음이 사라졌을 것이다. 톰은 어떠했어야 썸머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를 그녀에게 확인받았을까. 여전히 친구라고 말하는 썸머씨를 본 변호인은 더이상...아니다 다시 집중.

보이지 않는 사랑은 각자가 확신해야 하는 것인가, 확인시켜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데체 무엇일까. 각자의 붓을 들고 다른 도화지에 그려 서로의 일치됨을 확인하는 것일까, 같은 도화지에 같은 붓을 서로 붙잡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일까.

너무 어렵다. 각자가 그린 그림이 같을 땐 행복할까. 같은 붓을 들고 서로의 밀고 당김에 양보를 한다고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는 것일까. 한치의 양보 없이 밀고 당기며 그려낸 그림이 오히려 추상화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들 눈에 어떠하든 서로가 만족하는 그림은 어떠한가. 누가 홍상수, 김민희에게 돌을 던지랴, 던지면 또 어떠한가 정답이 없나 보다. 끝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 고개를 스무개는 넘어야지 어쩌겠나. 다만, 고개를 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굴곡들을 어떻게 넘어가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기대와 현실은 항상 다르다. 아니다 항상 다른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는 자신의 기대를 현실로 만들었고 현실로 지어진 건축에서 사람들의 더 큰 바람을 이끌어냈다. 건축가가 되지 못한 톰은 자신의 기대마저 현실로 짓지 못했다.

톰은 자신의 기대처럼 지어지지 않는 현실을 부정했다. 자신이 그려놓은 설계도대로 지어지지 않는 사랑의 공간이 싫었다. 그 공간은 함께 설계하고 같이 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해 흉물로 지어진 현실이 톰은 싫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자신이 멋들어진 사랑의 공간을 지어놨는데 그 안에 발을 들일지 말지를 고민했던 썸머를 탓해야 할까. 썸머에겐 죄가 없다. 톰에게 썸머는 client도 아니었고, co-architect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건물을 팔아 치우려는 집장사에 불과했다.

톰과 썸머와의 마지막 이별. 둘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어놓은 서로의 사전을 그제서야 확인했다. 그리고는 서로의 단어를 자신의 사전으로 옮겨놓았다. 너가 적어놓은 그것을 이제는 알겠다고 둘은 말했다. 썸머를 향한 톰의 사랑은 쓰이고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비로서 완성되었는데 그것을 썸머가 아무런 노력 없이 앗아가는 듯 보여 다들 그렇게 썸머를 욕했나 보다.

썸머는 받기만 하고 톰을 떠났을까? 톰에게 열병 같던 썸머, 여름이 가고난 후 우연같이 찾아온 오텀. 이 만남도 우주의 이치일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무엇이 우연이고 무엇이 우주의 이치인가. 하필 그녀의 이름이 오텀이어서일까.

톰이 배운 게 있다면 누구도 위대한 우주의 이치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연! 그것은 우주의 이치다.

썸머가 떠나고 찾아온 오텀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썸머와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운명과 기적은 없다는 걸 톰은 배웠다. 우주라는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도착할 곳, 만나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별이 있을까. 우연, 우주의 이치라는 말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그리고 썸머가 톰에게 놓고 간 것도 알 것 같다.

오텀은 톰에게 반드시 만나야 할 운명, 기적처럼 만나야 할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연처럼 스쳐지나쳤을 그때, 오텀을 끌어당긴 톰의 인력. 그것은 썸머가 톰에게 심어준 것이 아닐까.

이제 톰은 혼자서 집을 짓지 않고 자기만의 사랑을 써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생각난 자막을 통해 작가가 말했던 그 이름, 제니 백맨. 여자 이름이 아니었다.

둘이 헤어질 때 서로의 입에서 서로도 모르게 나온 Just라는 단어가 유달리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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