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놓친 영화, '시월애'를 이제 막 보던 참이었다. 앳된 '모래시계'의 재희에서 벗어난 이정재를 만났고, 아직 엽기적이지 않을 전지현을 만났다. 오래도록 듣고 불렀던 노래 '너를 위해'가 담겨 있는 영화, '동감'을 보려 했으나 '왓챠플레이'에는 없었다.
해변가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집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교차하는 순간, 그 시절에는 이런 판타지 같은 멜로가 유행이었구나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참 다행이었다, 끊기는 순간이 중간이 아닌 처음인 것이. '왓챠플레이' 12달 무료 이용권은 그 순간 막을 내렸다.
망할 통장 잔고, 지난주 친구를 불러 내 술을 먹지 않고, 담배 한 갑 덜 폈다면 나는 시월애를 보고 있을텐데. 이미 내 앞에는 만원에 4캔 맥주 중 한 캔이 비어져 있었고, 이제 막 구워낸 오뚜기피자 반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젖은 발을 빼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외장하드를 연결해 빠르게 훑어본다, 이러지 않으려고 유료 결제를 했었는데. 어둠의 경로를 벗어난지는 꽤 되었다. 멜론을 이용한지도 십여 년이 되었을 텐데, 20여 년을 이용한 skt처럼 혜택이 없다. 망할 잔고와 함께 눈에 들어온 이름, 르윈. 이럴 때 다시 만나다니, 동지를 만난 듯이 눈물겹다.
세상과 타협 없이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고 사는 르윈을 보자니 과연 Inside Llewyn이다. 세상과의 타협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 것일까, 매일 세상에 지기만 하니 말이다. 사실 그에게는 실제적인 울타리가 없다, 주소를 적어낼 집도 없으니 말이다. 자신과 타협해낼 물리적인 공간도 부족한 그에게는 염치없음이 가장 큰 재산이다.
존재하는 없음이 실체 없는 재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한편으로 르윈이 부럽기도 하다. 부럽다가도 부럽지 않은 것은 존재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실체 없게 만드는 르윈의 태도이다. 얼굴에 붙어있는 입과 귀가 가깝듯이 자신이 내뱉는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자신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본인의 뇌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나, 어딘가에 무언가를 놓고 오지 못할 메아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면, 내던진 부메랑이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냥꾼이 있을까. 언제까지 소파 사냥꾼이 될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몇 번에 걸쳐 읽었던 것은 '상실의 시대'도 맞지만 '해변의 카프카'가 더 맞다. 까마귀 소년이라 불리던 주인공의 곁에 있는 까마귀는 결국 무의식중의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는 르윈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글자로 써 내려간 까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아 제 나름의 역할을 다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영화 속 고양이는 배우들보다 더 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갑작스럽게 떠안게되고 사라지게 된, 마음이 쓰이지만 필사적으로 찾지는 않는, 우연히 발견함에 필사적임을 보이지만, 뒤바뀐 것에 게이치 않고 그대로 자신의 곁에 두고 있는 고양이는 르윈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두 시간 안팎의 영화 속 장면이나 대사 하나부터 스쳐 지나가는 인물까지 글을 쓴 작가나 장면을 만드는 연출자나 허투루 지나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읽어내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 달라진다. 하나라도 더 건져낸 자는 막이 내리고 나선 엘리베이터에 서서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다. 그걸 잡지 못해 매번 다시 꺼내든다. 지팡이를 든 터너와 그의 차를 모는 조니는 어떤 역할이었을까. 그들과 헤어지고 종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역 안에서 마주한 지팡이는?
다행히도 르윈의 울타리는 멈춰 있지 않다. 유목민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놓인 것인지, 아니면 정처 없이 떠도는 뗏목에 자신을 맡겨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고이지는 않았다. 고여있는 오아시스와 우물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신의 발걸음대로.
자신이 놓친 우연 같던 기회는 똑같은 상황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지나가서 다시 잡을 수 없는 그것을 다시 잡는다면 어떨까라는 가정은 이미 떠나고 없다. 시간은 흐르고 흐르니까. 노래는 계속 불러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무얼 채우며 살고 있는지 몰랐던 르윈은 영화가 시작한 처음의 장소로 돌아와 자신에게 일갈하던 남자, 아니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난다. 예전의 자신은 잡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 르윈은 실체 없을 것 같던 있음을 발견하고 존재할 것 같던 없음을 버렸을까.
너는 어떠한가. 또 꿈만 꿀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