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삐리삐릿"
"통신보안 3X 소초 상황실입니다, 고가, 무슨일입니까?"
"..."
"고가, 김병장님?"
"... 아... 저..새끼.. 저.. XXX... 저놈이..."
"김병장님?"
"탕~"

고가 초소 (From http://armynuri.tistory.com/616)
11월 말, 이미 겨울이 와버린 강원도 전방 고가 초소에서 수류탄이 터져 김병장이 폭사했다. 초소 밖에선 김이병이 총에 맞아 죽은채 발견되었다. 현장 증거는 김이병의 자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연이었다. 수류탄 파편이 인터폰 스위치를 건드렸고, 김병장의 마지막 육성이 소초 상황실에 전달되었다. 김이병은 밖에서 인터폰이 연결된 상황을 알아챘을까. 혹시 김병장이 즉사했거나 인터폰이 연결 안되었다면 그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끔찍한 위 사건은 군대에서 가끔 발생하는 사건사고 중 하나이다. 나에게 괴이한 이야기는 사실 그 다음이다.
여느 사회 조직이라도 그러겠지만, 군대라면 더더욱 명확하게 원인과 조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위 사건은 뉴스에 나올만한 큰 사건이어서,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줄줄히 좌천되었으며, 군단 또는 군 사령부 급에서 조사를 관할하였다. 소대원 전원이 심문받았으며, 김이병과 김병장의 일기장과 다른 모든 기록들이 검토되었다. 그렇게 몇 주의 조사를 마치고 후속조치가 취해졌다. 그 후속조치란
- 병력을 보충하여 2교대 근무를 3교대로 전환
- 이등병에게 상하의 깔깔이 (솜 누비진 속옷) 꼭 착용시키기
였다. 김이병의 일기장에서는 졸리다, 피곤하다, 그리고 춥다라는 불평 밖에 다른 요인은 찾지 못했나보다...
사건 당시 사단 신병교육대에 있던 나는, 신교대 퇴소 후 병력 보충이라는 조치의 일환으로 상당수의 내 동기들과 함께 GOP부대로 보내졌다. 연대 대기중이던 어느날, 우리 신병들은 연대장에게 격려받는 행사를 치뤘다. 좌천성 인사발령 직전의 연대장은, 단단하고 우람한 덩치에 단정한 머리가, 침울한 얼굴 표정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고가 난 바로 그 중대로 가게되었다. 대대본부에서 우리들을 각 중대로 인계했던 인사장교가 다음날 내가 옮겨간 중대의 중대장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 임시 중대장은 나에게 이런걸 물었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 안나자만, 선임과 후임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할 수 있겠는가 뭐 이런 질문이었다.
'저.. 전 여기 처음 오는데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까요?'
물론 내 입을 통해 나온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뿐이었다.
GOP에 갓 들어온 이등병은 경계근무를 서지 않는다. 처음에는 소대장(여기서는 소초장이라 부른다)이나 부소대장(부소초장) 순찰을 따라다니는 전령 역할이다. 순찰은 경계근무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계속 움직이는 일이다. 강원도의 철책을 따라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린다. 소초장은 자신의 의지로 내복조차 입지 않는다. 영하 10도 정도의 날씨에는 등산하면 금방 땀이나기 때문이다. 신병인 우리들은 강제로 내복에 깔깔이 바지까지 해서 하의만 3겹, 상의는 4겹을 입는다. 그리고 소초장 뒤를 쫓아가며 나와 내 동기는 더위와 끕끕함에 낙오한다...
그렇게 나의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사고난 부대에 많은 이목이 쏠린 관계로 이등병이라기 보다는 이등별 대접의 나름 편안한(?) 보병 땅개 일빵빵 1111 생활이었다.
100일 휴가 나왔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 동창의 후배가 마침 내가 배속된 부대 연대장이었다고. 아들 부탁 다 해놨는데, 갑자기 그 연대장이 전출되었다고...
올 가을이면 정확히 20년 전 일이다. 이정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기억은 미화된 추억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사건이 보이기도 한다. 위 사건의 원인 분석 및 후속 조치에 대한 보고서를 쓰던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꼬였다고, 왠 미친놈이 최전방까지 굴러들어와서 수류탄 까고 지는 죽어버렸는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뭐라고 써야하나... 이랬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게 이해되진 않는다. 당시 수류탄 통 겉의 안전띠를 찢고, 통 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꺼내어 안전핀을 뽑으면서 김이병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K2 소총으로 자신을 겨누는 그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가장 어려운 질문. 그때 내가 여기가 아닌 다른 편한 곳으로 빠졌으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