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무게 6 - 낭만에 대하여(가든팍님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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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 의아하기도 했다. 내 주소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거니와 이메일 같은 선진 문물을 누릴 사람이 내 주변에는 얼마 없었다. 더욱이 발신인은 초등학교 동창의 이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놈이라 이름만 보고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졸업 후 15년도 더 지났는데 한두 명 밖에 모르던 내 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 수 있었냐는 것이다. 궁금증에 못 이겨 메일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녀석의 순정 어린 노고가 활자로 찍혀 있었다.
나를 찾기 위해 다음을 검색해서 같은 이름을 모두 찾아 메일을 보냈다는 것과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동창 모임을 하고 있으니 시간 날 때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널리 회자하던 아이러브스쿨을 모를 리 없었지만, 불륜의 온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터라 별 흥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난 총각이었으니까.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이미 몇 번의 모임을 가졌던 친구들은 서로 서먹하지 않았다. 그 날 나를 찾던 녀석은 참석하지 않았고 덕분에 약간 어색해야 했다. 그래도 옛 친구들이다 보니 어린 시절 때꼬장물 흘리던 모습이 생각나 금세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대부분은 아는 친구들이었고 일부는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펄 화장품을 써서 얼굴이 반짝이던 키 작은 그녀도 처음 보는 아이였다. 웃으면 보조개가 생기는 귀여운 얼굴이어서 내 눈은 나도 모르게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 후 동창 모임을 꾸준히 나가게 되었다. 그 친구가 아니라 그녀 때문이었다. 세 놈 정도는 이미 그녀를 눈독 들이고 있었고 그놈들 외에도 잠정적인 경쟁자들이 더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녀와 연애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자면 몇 편의 포스팅이 더 필요하겠지만, 나는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서울특별시 지도 위에 크게 역삼각형을 그린다. 아래쪽 꼭짓점은 내 직장이 있던 양재동, 오른쪽 위 꼭짓점은 그녀가 일 다니던 장안동, 나머지 왼쪽 위 꼭짓점은 그녀의 집이 있던 연신내, 내가 살던 곳은 삼각형의 무게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 옆 보광동이었다. 직장을 압구정동 쪽으로 옮기기 전까지, 일이 너무 늦게 끝나거나 다른 약속이 잡히지 않는 한, 난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야밤 서울 투어를 거의 거르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장안동에서 기다려 주었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우리의 데이트 코스였다. 연신내의 술집을 돌아다니다가 그녀를 들여보내고 늦은 밤 보광동으로 돌아왔다.

박씨 물고 온 제비라는 주점을 참 많이도 다녔다. 연신내 먹자골목에 있었는데 한 10년쯤 지났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시골 초가집 같은 인테리어에 굴전이 괜찮았다. 두껍고 투박한 통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조금 불편한 통나무 의자에 앉아 그녀와 난 소주나 막걸릿잔을 부딪혔다. 테이블 한 개만 쏙 들어가 있는, 통유리로 된 창가 자리를 즐겼다. 어느새 우리는 마주 보지 않게 되었고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그 술집, 아직도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인가 전철은 이미 끊겨서 버스를 타야 했다. 술값으로 탈탈 털린 날이라 주머니에는 버스비만 달랑달랑했다. 그녀는 택시비를 주려고 했지만, 난 버스는 끊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남자답게(?), 제법 단호하게(??) 거절했다. 언제나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는데 그날 그녀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동행해 주었다. 작별 인사 후 그녀는 돌아갔다. 직통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갈아타기 위해 광화문에서 내려야 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보광동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루함을 잊기 위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핀잔과 걱정이 반씩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 거 같아서 오히려 어깨가 으쓱해졌다. 덕수궁과 삼성플라자를 지나 서울역 지하도를 건넜다. 전화 통화에 정신이 팔려 숙대 앞과 삼각지를 지나서야 어디까지 왔는지 자각할 수 있었다. 시린 손을 번갈아 가며 전화기를 들고 있었으니 겨울 초입이 아니었을까. 녹사평과 이태원을 뒤로하고 집에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고 씻지도 않은 채 이불 속에 들어갔다. 잠들기 직전, 배터리도 지쳐 방전되기 직전에 우리는 전화기 너머로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 시시껄렁했을 대화는 완전히 소멸하여 한 소절도 남아 있지 않다.

회사 차를 가지고 다닌 날에는 술은 먹을 수 없었어도 편하게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1톤 트럭이었는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잘 타 주었다. 장갑과 차 덮개와 빵 봉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가끔 적재함의 짐들도 눈이 시퍼레서, 아무래도 키스각은 나오지 않았다.
한번은 전화 통화 중 노래 불러 달라길래 이문세의 소녀를 길 한가운데서 목청껏 불렀었다. 운전 당하고 있던 트럭이 제멋대로 속도를 높였고 헤드라이트가 더 환하게 웃었다.

보조개가 예쁘던 그 선녀는 아들 셋을 낳더니 홀연히 승천하였다. 그리고 보조개만 비슷하게 생긴 시종을 보내온 것 같다. 지금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니 확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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